우리의 액운을 막고 만사형통을 빌어줄 조상은 누구인가
바깥 존재들의 계보를 그리고 돌봄을 위한 새로운 조건을 만들기
원문보기
최근에 필자가 일하는 또다른 단체가 처음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얻어 이사를 하고 집들이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집들이에 참여하는 이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고사를 준비하기로 했는데 고사상과 축문을 우리 단체에 어울리고 의미 있게 만드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허례허식이 아닌, 일회적 이벤트도 아닌 것이 되길 바랐다. 우리는 경전에 도전하고 관습에 저항하며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으로서, 이 전통의 형식을 가져오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했다. 우리가 이 세계에 한 발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를 변형시켜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집들이에 모인 사람들과 공통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말과 형식을 발명하고, 그 감각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그날 약속하고 상상했던 지향들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의 조상은 누구인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해 설립하고 활동하는 단체에 맞게 고사상에는 이러한 권리를 상징하는 온갖 도구들이 전시되었다. 성재생산권리보장기본법(안) 책자, 성건강을 위한 핑거돔과 콘돔과 젤, 월경 조절과 피임을 위한 콘돔과 신체 삽입형 장치들, 임신테스트기. 그리고 임신중지를 위한 진공흡입시술 도구. 그리고 성적 즐거움을 위한 다양한 섹스토이와 SM 도구들. 여기에 놓인 것들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먼저 떠난 이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부재해서, 부정의가 난무해서 차별과 낙인을 경험한 이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 나가야 하는지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집들이 고사상 장면
축문을 작성할 때는 액운을 막고 만사형통을 기원하기 위해서 어떤 조상을 불러내 무엇을 빌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조상을 발명하고 호명하는 작업이 활동의 일환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기릴 것인가. 우리의 조상은 누구인가. 우리를 걱정하며 액운을 막아줄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복을 바라는가. 우리의 계보와 지향을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셰어를 낳은 모든 조상이여
낙태죄를 이유로 도움을 청할 수 없어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하다가 사망했던 청소년 조상이여
성별정체성을 숨겼다면서 격분한 애인에게 혐오살인을 당한 트랜스젠더 조상이여
본국에서 혼인한 경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한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한 이주여성 조상이여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고 시설에서 강제불임 수술을 겪고 세상을 떠나간 장애인, 한센인 조상이여
HIV감염인으로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다가 떠나간 성노동자 조상이여
성적 자율성과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추방당하고 감금되어 소리없이 떠나간 조상이여
전시 성폭력과 인종청소를 위한 강간의 피해를 겪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다가 떠나간 조상이여
차별과 불평등, 착취와 수탈에 맞서 정의롭게 세계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떠나간 조상이여
이 모든 이유로 장례없이, 묘지없이, 이름없이, 애도없이 떠나간 우리의 조상들이여
이제 셰어의 독립적인 터전을 마련하여 고사를 올립니다. 조상님께서 굽어 살펴주시고 도우셔서 셰어에게 향후 어려움이 없도록 하여주소서.
(하략)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집들이 고사 축문, 2024년 5월 2일.(전문보기)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혼자만의 의지로 이 세계에 등장할 수 없으며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의 초대를 통해 이 세상에 등장하고, 다른 존재에 기대어 생존한다. 하지만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법에서 좁게 규정한 가족의 계보, 정상성의 기준에서 탈락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배규범은 법 안으로, 규범 안으로 들어올 때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거짓이다. 지금의 체제는 적대와 경쟁을 정상으로 만드는 질서를 구축하고,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강요한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침묵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지금의 체제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다가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사라진 이들, 지배체제에 저항하다가 쓰러진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수신확인을 통해서 역사와 공동체에 응답하기
최근에 두가지 기회를 통해서 낙인으로 인해 누락된 역사를 발굴할 때 우리에게 공동체를 만들어갈 새로운 힘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서보경은 <휘말린 날들>에서 정민숙이라는 존재를 발굴해내고 초기 여성 감염인으로서 그가 겪었던 사회적 낙인과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성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강제 검진이 부당한 것을 제기하고, 동료 감염인들에게 잘 곳을 내어주고, HIV 공동체를 위해서 기여했던 바를 알려주었다. “HIV가 감염한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성을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감염한 사람들 모두를 하나의 계보로 엮어줄 수 있다면, 지금 새롭게 생겨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로 자신이 이 진실하고 굳건한 여성의 후예라는 걸, 꼭 알아야만 한다”1)고 적었다.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예외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거나, 더 중요하게는 ‘없었으면 좋았을 일’이거나 ‘앞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로서 기록되는 존재라는 것은 생전에 그를 살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공통성이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수신하고 그것을 우리의 계보로 삼아서 그 뜻을 이어 나갈 책임을 느끼는 것이 우리가 관계를 맺게 하는 동력이자 의미가 된다. 메시지의 수신자는 HIV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위험한 존재, 예방의 대상으로 규정된 모든 이들을 향한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가 주최한 2022년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장면
또 하나의 기회는 <플라이 인 파워>라는 영화를 통해서 가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미국 아시아성노동자들의 단체인 레드카나리송에서 제작한 것으로, 한국인 마사지사 샬롯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들이 경험하는 억압과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가 개최한 2023 성노동자 추모행동의 날 기념으로 열린 행사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고, 공동감독 중 한명인 라윤님이 방한해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것을 영어로 말하면 평화 속에 잠들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제 조상들은 평화 속에 잠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애틀란타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던 것이 영상에 나왔는데 그 이후 저희 조상님 분들의 힘으로 많은 후원금이 모였고 그 돈을 통해서 레드카나리송도 계속 활동을 하고 조상님들의 이름을 빌어서 계속해서 성노동자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조상’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에게 의미 있게 꽂혔다. 나를 살아가게 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흐름 속에 존재하는 조상은 부계혈통 ‘나’씨가 아니다.
왜 돌보는가, 무엇을 돌보는가를 다시 질문하며
한 사람을 이 세계에 초대하는 일, 우리가 초대한 이들이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원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일,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차별을 겪을 때 그것을 함께 바꾸어 나가는 일, 먼저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품고 살아나가는 일. 이것을 우리는 재생산권, 가족구성권, 인권이라고 부른다. 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권리의 주체들은 국가가 법이나 제도를 통해 해야 하는 것을 강제하고, 또 법이나 제도가 해낼 수 없는 영역을 자율적인 실천으로 채워 나간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섬기는’ 사회에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와 관계, 실천들은 생존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력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관계와 자율성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 또한 금지되어 왔다. 지배질서는 빈곤한 사람들, 정상가족을 떠나는 사람들, 경쟁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사람들,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 성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 무상으로 자원을 나누고 자율적으로 돌보는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이 살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이들을 지배질서에 종속시켜왔다. 그럼에도 지배질서를 거스르는 이들이 언제나 있어왔다. 나는 그런 이들을 우리의 조상으로 초대하고, 그 조상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상상하길 제안한다. 나는 이 계보 만들기가 지배질서에 어긋난 이들을 돌보는 방법론이라고 믿는다.
돌봄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던 이들은 돌보는 행위가 일방적일 수 없고, 돌봄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호적인 기여를 인식하며, 서로가 존재할만한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느끼며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에서 이탈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이 행하는 돌봄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저항적인 실천이 되고야 만다. 정상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탈가정, 탈학교, 탈시설한 상황 속에서 오롯이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돌보는 행위,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 차별과 낙인에 저항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라는 자각이 돌봄을 실천하는 이유와 의미가 된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명령을 거부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와 계보를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문을 쓰고 고사를 지내는 과정이 바로 계보를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할 이들을 확인하고 감각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함께 생존하고 연대하고 돌보기로 한다. 저항적 계보는 저항할 힘을 만들어준다.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상속은 우리의 유산을 공산적, 공통적인 자원으로 만든다. 자원이 없는 이들이 함께 생존해 나갈 수 있는 돌봄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방식은 앞으로도 이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2022.
나영정, “행복이 들어갑니다? 쾌락과 돌봄을 다시 발명하기”, <문학동네> 113호, 2022.
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서보경, <휘말린 날들 -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반비, 2023.
터울, [활동스케치 #3] 2022 성소수자 추모의 공간, KISS & CRY,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 (원문링크)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빨간소금, 2024.
나영정 -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
가족구성권연구소,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연구모임POP의 멤버이고 HIV/AIDS인권활동네트워크,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등에 참여하고 있다. 요즘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 침묵하고 공모하는 세계에 대해 올바로 감각하려 애쓰고 있다.
우리의 액운을 막고 만사형통을 빌어줄 조상은 누구인가
바깥 존재들의 계보를 그리고 돌봄을 위한 새로운 조건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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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필자가 일하는 또다른 단체가 처음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얻어 이사를 하고 집들이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집들이에 참여하는 이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고사를 준비하기로 했는데 고사상과 축문을 우리 단체에 어울리고 의미 있게 만드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허례허식이 아닌, 일회적 이벤트도 아닌 것이 되길 바랐다. 우리는 경전에 도전하고 관습에 저항하며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으로서, 이 전통의 형식을 가져오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했다. 우리가 이 세계에 한 발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를 변형시켜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집들이에 모인 사람들과 공통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말과 형식을 발명하고, 그 감각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그날 약속하고 상상했던 지향들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의 조상은 누구인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해 설립하고 활동하는 단체에 맞게 고사상에는 이러한 권리를 상징하는 온갖 도구들이 전시되었다. 성재생산권리보장기본법(안) 책자, 성건강을 위한 핑거돔과 콘돔과 젤, 월경 조절과 피임을 위한 콘돔과 신체 삽입형 장치들, 임신테스트기. 그리고 임신중지를 위한 진공흡입시술 도구. 그리고 성적 즐거움을 위한 다양한 섹스토이와 SM 도구들. 여기에 놓인 것들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먼저 떠난 이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부재해서, 부정의가 난무해서 차별과 낙인을 경험한 이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 나가야 하는지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집들이 고사상 장면
축문을 작성할 때는 액운을 막고 만사형통을 기원하기 위해서 어떤 조상을 불러내 무엇을 빌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조상을 발명하고 호명하는 작업이 활동의 일환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기릴 것인가. 우리의 조상은 누구인가. 우리를 걱정하며 액운을 막아줄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복을 바라는가. 우리의 계보와 지향을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셰어를 낳은 모든 조상이여
낙태죄를 이유로 도움을 청할 수 없어 화장실에서 혼자 출산하다가 사망했던 청소년 조상이여
성별정체성을 숨겼다면서 격분한 애인에게 혐오살인을 당한 트랜스젠더 조상이여
본국에서 혼인한 경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한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한 이주여성 조상이여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고 시설에서 강제불임 수술을 겪고 세상을 떠나간 장애인, 한센인 조상이여
HIV감염인으로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다가 떠나간 성노동자 조상이여
성적 자율성과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추방당하고 감금되어 소리없이 떠나간 조상이여
전시 성폭력과 인종청소를 위한 강간의 피해를 겪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다가 떠나간 조상이여
차별과 불평등, 착취와 수탈에 맞서 정의롭게 세계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떠나간 조상이여
이 모든 이유로 장례없이, 묘지없이, 이름없이, 애도없이 떠나간 우리의 조상들이여
이제 셰어의 독립적인 터전을 마련하여 고사를 올립니다. 조상님께서 굽어 살펴주시고 도우셔서 셰어에게 향후 어려움이 없도록 하여주소서.
(하략)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집들이 고사 축문, 2024년 5월 2일.(전문보기)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혼자만의 의지로 이 세계에 등장할 수 없으며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의 초대를 통해 이 세상에 등장하고, 다른 존재에 기대어 생존한다. 하지만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법에서 좁게 규정한 가족의 계보, 정상성의 기준에서 탈락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배규범은 법 안으로, 규범 안으로 들어올 때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거짓이다. 지금의 체제는 적대와 경쟁을 정상으로 만드는 질서를 구축하고,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강요한다. 누군가를 착취하고 침묵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지금의 체제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다가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사라진 이들, 지배체제에 저항하다가 쓰러진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수신확인을 통해서 역사와 공동체에 응답하기
최근에 두가지 기회를 통해서 낙인으로 인해 누락된 역사를 발굴할 때 우리에게 공동체를 만들어갈 새로운 힘이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서보경은 <휘말린 날들>에서 정민숙이라는 존재를 발굴해내고 초기 여성 감염인으로서 그가 겪었던 사회적 낙인과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성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강제 검진이 부당한 것을 제기하고, 동료 감염인들에게 잘 곳을 내어주고, HIV 공동체를 위해서 기여했던 바를 알려주었다. “HIV가 감염한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성을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감염한 사람들 모두를 하나의 계보로 엮어줄 수 있다면, 지금 새롭게 생겨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로 자신이 이 진실하고 굳건한 여성의 후예라는 걸, 꼭 알아야만 한다”1)고 적었다.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예외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거나, 더 중요하게는 ‘없었으면 좋았을 일’이거나 ‘앞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로서 기록되는 존재라는 것은 생전에 그를 살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공통성이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수신하고 그것을 우리의 계보로 삼아서 그 뜻을 이어 나갈 책임을 느끼는 것이 우리가 관계를 맺게 하는 동력이자 의미가 된다. 메시지의 수신자는 HIV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위험한 존재, 예방의 대상으로 규정된 모든 이들을 향한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가 주최한 2022년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장면
또 하나의 기회는 <플라이 인 파워>라는 영화를 통해서 가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미국 아시아성노동자들의 단체인 레드카나리송에서 제작한 것으로, 한국인 마사지사 샬롯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들이 경험하는 억압과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가 개최한 2023 성노동자 추모행동의 날 기념으로 열린 행사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고, 공동감독 중 한명인 라윤님이 방한해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것을 영어로 말하면 평화 속에 잠들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제 조상들은 평화 속에 잠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애틀란타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던 것이 영상에 나왔는데 그 이후 저희 조상님 분들의 힘으로 많은 후원금이 모였고 그 돈을 통해서 레드카나리송도 계속 활동을 하고 조상님들의 이름을 빌어서 계속해서 성노동자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조상’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에게 의미 있게 꽂혔다. 나를 살아가게 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흐름 속에 존재하는 조상은 부계혈통 ‘나’씨가 아니다.
왜 돌보는가, 무엇을 돌보는가를 다시 질문하며
한 사람을 이 세계에 초대하는 일, 우리가 초대한 이들이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원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일,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차별을 겪을 때 그것을 함께 바꾸어 나가는 일, 먼저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품고 살아나가는 일. 이것을 우리는 재생산권, 가족구성권, 인권이라고 부른다. 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권리의 주체들은 국가가 법이나 제도를 통해 해야 하는 것을 강제하고, 또 법이나 제도가 해낼 수 없는 영역을 자율적인 실천으로 채워 나간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섬기는’ 사회에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와 관계, 실천들은 생존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력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관계와 자율성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것 또한 금지되어 왔다. 지배질서는 빈곤한 사람들, 정상가족을 떠나는 사람들, 경쟁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사람들,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 성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 무상으로 자원을 나누고 자율적으로 돌보는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이 살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이들을 지배질서에 종속시켜왔다. 그럼에도 지배질서를 거스르는 이들이 언제나 있어왔다. 나는 그런 이들을 우리의 조상으로 초대하고, 그 조상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상상하길 제안한다. 나는 이 계보 만들기가 지배질서에 어긋난 이들을 돌보는 방법론이라고 믿는다.
돌봄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던 이들은 돌보는 행위가 일방적일 수 없고, 돌봄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호적인 기여를 인식하며, 서로가 존재할만한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느끼며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에서 이탈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이 행하는 돌봄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저항적인 실천이 되고야 만다. 정상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탈가정, 탈학교, 탈시설한 상황 속에서 오롯이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돌보는 행위,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 차별과 낙인에 저항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라는 자각이 돌봄을 실천하는 이유와 의미가 된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명령을 거부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와 계보를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문을 쓰고 고사를 지내는 과정이 바로 계보를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할 이들을 확인하고 감각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함께 생존하고 연대하고 돌보기로 한다. 저항적 계보는 저항할 힘을 만들어준다.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상속은 우리의 유산을 공산적, 공통적인 자원으로 만든다. 자원이 없는 이들이 함께 생존해 나갈 수 있는 돌봄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방식은 앞으로도 이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2022.
나영정, “행복이 들어갑니다? 쾌락과 돌봄을 다시 발명하기”, <문학동네> 113호, 2022.
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서보경, <휘말린 날들 -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반비, 2023.
터울, [활동스케치 #3] 2022 성소수자 추모의 공간, KISS & CRY,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소식지, (원문링크)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빨간소금, 2024.
나영정 - 가족구성권연구소 정책팀장
가족구성권연구소,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연구모임POP의 멤버이고 HIV/AIDS인권활동네트워크,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등에 참여하고 있다. 요즘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 침묵하고 공모하는 세계에 대해 올바로 감각하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