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후기]2023년 12월 월례포럼 후기 : 황지성, <장애여성의 시설화 과정에 관한 연구>

2024-01-16


일시 : 2023년 12월 7일 저녁 7시

장소 : 커뮤니티 늘봄

 

    가족구성권연구소 12월의 월례포럼은 2023년 8월에 나온 황지성 님의 학위논문을 함께 논의하며 톺아보는 시간이었다. 논문 제목은 “장애여성의 시설화 과정에 관한 연구 :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 사례를 중심으로, 1961~2010”이다. 황지성 님은 장애여성공감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현재는 성적 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기획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월례포럼은 황지성 님이 320페이지에 달하는 학위논문 내용을 간략히 발제를 하고 포럼의 참석자 분들의 질문과 논의를 이은 다음에 함께 소회를 나누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한국의 정신적 장애인의 시설 수용 규모가 전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큰 현실에서 이 논문은 ‘정신적 장애여성’이라는 교차적 주체의 구성과정과 그들의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교차적 몸이 위치해야 할 장소가 ‘시설 혹은 가족’이라는 이항 선택지로 강제되어온 과정을 추적한다. 논문의 저자 황지성 님은 국제 인권레짐이 부상하고 복지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이룬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신장애인에 대한 대규모의 시설화가 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지, 탈/시설화 논의에서 정신적 장애여성은 왜 사라져 보이지 않는지를 질문하며, 1961년 “부랑부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서울시립부녀보호소’의 변화과정을 통해 젠더, 계급, 장애 등이 교차하며 여성들의 삶을 장애화하고 시설화하는 사회적 정치적 과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시설화의 주요 기제로서 국가와 사회, 가족제도, 의료복지체계, 시민사회 등의 복잡한 이해접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결과, 비/장애 여성의 장애를 물질적으로 구성, 심화하고 이들의 시설화를 추동한 핵심적 요인은 이성애 규범적 가족과 젠더관계였다. 가정과 일터에서 가해지는 젠더폭력과 차별, 유무급 노동착취와 같은 총체적인 젠더 불평등이 여성의 몸와 마음의 장애화를 추동하고, 국가가 가족에게 생계와 복지를 전가하는 “가족 자유주의, 가족중심 복지제도”가 장애여성의 삶을 시설로 위치짓는 핵심적 기제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가족은 시설과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정신장애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시설화된 삶을 장기적으로 지속시키는 합법적 제도로서 지금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논문은 많은 비/장애여성들이 ‘장애화’되고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비생산적인’ 존재가 되어 가족성원권을 박탈당하고 가족으로부터 방임, 유기되어 부랑하거나 위탁되어 시설로 배치되어왔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복지제도가 부재했던 개발국가였을 때나, 이후 복지국가를 자처하며 보편적 복지제도라고 과시할 때에도 사회적 현실은 국가가 아닌 가족이 가족구성원의 생계와 돌봄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마땅하다는 가족 중심의 복지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불평등한 가부장적 이성애 가족제도와 사회의 구조적 젠더불평등과의 접합을 통해 착취하고 억압하고 장애화하여 가족밖으로 방출한 비/장애여성을 시설화하며 민간중심의 대규모 복지시설로 확장해 나갔다고 분석했다.

    황지성 님은 한국 사회복지에서 ‘가족자유주의’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시장화’임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강화로 정부는 민간자본축적의 효율화를 목표로 복지서비스를 시장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정부의 적극적인 자본 투자를 통해 확산된 민간 의료복지산업체는 부랑(빈곤), 장애, 젠더 등의 정체성이 중첩된 대규모 인구를 시설과 병원을 통해 수용하며 성장했다. ‘복지서비스 일종’이라는 미명하에 시설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속에서 당면한 사회재생산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가족의 합리적 선택으로 자리잡았다.

    논문은 의료복지 관련 전문가, 인권‧시민사회 진영 등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와 장애에 대한 의료적‧생물학적 관점이 이러한 총체적 시설화를 정당화했다고 지적한다. 비/장애 부랑인, 윤락여성 등을 빈곤, 장애, 젠더와 결부시켜 격리가 필요한 위험한 인구군으로 설정하고, 이들에 대한 진단, 감별, 선도와 갱생 등을 선도했던 우생학적 관점은 1980년대 이후 국제적 인권 레짐의 부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만, 이를 대체하여 전문적인 의료담론과 실천이 여전히 이들을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구성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보건법에 위임된 정신장애는 의료모델이 주가 되면서 약물로 개별적 증상을 조절하는데 치중하는 의료진들이 환자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치료와 회복을 어렵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감금, 즉 화학적 감금 현상을 강화하여 시설화를 대체하고 있고, 노숙과 정신장애가 중첩된 많은 사람이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시설과 요양원, 병원 등 각종 지원체계를 회전하는 은밀한 시설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정신장애가 장애인 운동에서 분리되고 탈원화 논의 역시 탈시설 논의와 분리되면서 2023년에도 정신적 장애인의 장기적인 시설화, 병원화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탈시설화와 탈원화는 반드시 교차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황지성 님의 문제제기에 공감이 갔다.

    논문에서 분석된 정신장애여성의 시설화를 추동하는 복합적 기제는 국가권력의 통치전략과 경제체제의 양상에 따라 정도와 방식의 차이를 보였을 뿐, 논문에서 다루는 전 시기를 관통하여 작동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비/장애여성의 장애화와 시설화를 추동해온 젠더 불평등과 젠더부정의가 현재도 작동하고 있어 시설화 문제를 결코 젠더정치학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는 문장에서 황지성 님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포럼의 참석자들은 이 논문이 이질적인 몸이 국가의 통치성과 가족의 통치성과 연결되는 지점을 잘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정상가족의 정상국가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수록 생산적이지 않은 수많은 존재들, 불구가 되고 부랑을 하는 존재들이 평생 시설화되었다는 점과 민주화와 인권의 관점이 등장했어도 여전히 시설화가 복지의 관점으로 심지어 인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온 역사적 과정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갖게 되었고, 한국의 페미니즘 정치가 불구의 정치와 급진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는 소회를 나누었다.

    참석자들은 소년범 정의와 마찬가지로 ‘현저할 가능성’으로 정신장애가 있는 여성을 분류하는 문제점은 보호출산제도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함께 분개했다. ‘아이를 버릴 가능성이 있는 여자들’, ‘부양자가 없을 가능성’,‘지능이 없는 여자들’, ‘남편없이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잘못된 거라는 우생학적 전제가 ‘현저할 가능성’으로 여전히 살아있으며, 고아원에 아이를 버리는 ‘엄마’는 행복하게 잘 살아서 분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떠돌다가 다른 시설로 갈 수 밖에 없었을’ 탈가정의 문제를 여성혐오 혹은 모성 신화의 구도로 배치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잘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구의 탈가족화의 방향이 “사회화”인데 반하여 한국의 탈가족화 방향은 “시설화”이며, 오랫동안 누적된 역사적 구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성한 시스템이어서 서비스 지원 혹은 사회보험 개혁 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전망도 있었다. 시설이 치료와 재활의 기능을 가진다고 정당화하는 의료보건복지의 전문가 담론을 어떻게 타개해나갈 것인지 암담하지만, 현재 심각한 의료화/병원화/약물화의 흐름을 끊어내는 것, 탈원화의 이슈를 탈시설 논의와 교차하여 논의를 확장해가고, 민간위탁방식의 시장화를 공공성의 의제로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안에서 인신구속 개념은 받아들였지만 정신장애인 여성의 시설화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지점과 돌봄의 사회적 제도 체계에서 여성 안에의 계급 차이가 분명하게 대두되는 지점에 관해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투쟁 과정에서 장애, 젠더, 빈곤, 인종 등 교차적 주체에 대한 인식과 조우, 연대를 어떻게 모색하고 확장할 것인가가 여전히 중요한 성찰의 지점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사회적 낙인이 부가된 주체를 재현할 때, 주체가 보이지 않는 딜레마를 겪는데 이 논문안에서는 정신장애여성과의 면접을 통해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어 주체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음이 놀라우며, 연구자의 급진적 연구하기가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 실천적 연구에 참석자들이 깊은 감사를 표하며, 뒤이은 공론장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2시간을 마무리했다.

    늦은 후기를 작성하면서 아직도 마음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은 탈시설한 당사자가 사회적 자원도 없고 인간관계도 없는 시설 밖에서 더이상 정주하지 못하고 “자신이 돌봤던 장애여성”이 보고싶어서 시설로 돌아간 이야기였다. 단절되고 고립되고 배제된 삶에서 시설이 하나의 물리적 공간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장인 사회 전체가 시설로 작동한다는 ‘시설화된 사회, 시설 사회’의 책 내용과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소중한 관계들을 함께 복원하고 연결해내고 확장해나갈 것인가?

    며칠 전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요보호여자를 선도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70~80년대 ‘여성수용시설’이었던 부녀보호지도소/여자기술원에 대한 진실규명을 통해 국가의 인권침해를 인정했다는 보도가 떴다.* 기사를 읽어내려가다가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게 나았던 셈이다”의 문장에서 가슴이 턱 막혔다. 2024년에 와서야 겨우 “첫 확인”이라니... 역시나 정신장애 여성은 가시화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작성 : 정숙 운영위원)


* “호객했다고, 남자들과 싸웠다고 가둬, ...‘여성수용시설’ 인권침해 첫 확인", <한겨레> 202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