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떤 아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짓고 있는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이야 말로 비상사태
정부는 ‘인구국가비상사태’라는 말과 함께 다시 국민들에게 ‘결혼’하고, 그 관계 안에서 ‘출산’하고 ‘양육’을 하는 것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양육은 공동체의 책임을 원칙으로”라는 정부 대책에 적힌 한 줄처럼, 한 사회에서 새로운 구성원이 태어나고, 그가 어떤 양육자에게서 태어났는지 운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공동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정부가 말하고 있는 결혼-출산-양육-일가정양립이라는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이 인구정책의 세트구성은 오히려 어떤 양육자에게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공동의 자원을 배분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오로지 운에 의해서만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부는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결혼 베네핏을 주겠다며 혼인신고 시 특별세액공제를 도입하고 자산양도에 따른 비과세 기간을 연장하는 특례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정부는 이미 2024년 1월 1일부터 혼인이나 출산을 사유로 부모나 조부모 등 직계존속으로부터 최대 1억원까지 증여받는 금액에 대해 세금을 물지 않도록 하는 법을 시행한 바 있다. 출산은 혼인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혼과 그 출산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산 형성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정부 정책의 방향은 이성애법률혼 관계가 아닌 수많은 관계들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남겨둔다. 또한 출산과 양육에 필요한 기반도 법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알아서 물려주라는 메세지를 더 강하게 던지고 있다.
주거안정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주택공급을 확대하고 신혼부부, 출산가구, 다자녀가구에게 청약요건을 완화하고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은 결국 그 분양대금을 감당할 수 있는 노동시장에서의 지속적인 생산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 애초에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존재들, 질병이 있거나 속도가 느리거나 장애가 있는 존재들은 이 확대된 분양제도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신생아특례대출의 소득기준이 한시적으로 폐지되는 것이 주거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길인가? 개별 가구들이 결국 대출을 통해서만 주거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출을 갚을 수 있는 미래소득을 전제한다. 주거 공공성이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가정양립은 결국 주거공공성으로 위장된 대출 정책을 위해 노동시장으로 노동자를 빠르게 복귀시키기 위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저출생 대책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이, 가난한 자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등록 이주민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환대받을 수 있을까? 이성애법률혼 중심의 저출생 대책은 단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정주공간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사람의 ‘정상성’을 규정한다. 이성애 정상성에는 이미 나이,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조건의 정상성이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이혼을 할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키울 수도 있고, 친부모가 아이를 돌볼 상황이 되지 않아 위탁부모로서 아이를 돌볼 수도 있고, 조카를 돌볼 수도 있고, 친구의 아이를 함께 양육할 수도 있다. 아이가 아플 때 연락이 안되거나 올 수 없는 친권자를 찾아 발을 동동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고 있는 그 사람이 시급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행정적인 절차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가족돌봄휴가’가 아니라 ‘돌봄휴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결혼-출산-양육이라는 단선적인 생애주기를 상정하고 법적 가족만이 돌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는 돌봄 정책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생애변동성이 강해지고 돌봄에 관여하는 관계가 다양해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노동의 유연성보다 돌봄 정책의 유연성이다.
국가는 ‘어떤 아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짓고 있는가? 그 안에 장애를 가진 아이, 성소수자의 아이, 결혼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는 포함되어 있는지. 정부의 저출생 대책이 내포하고 있는 아이를 낳고 돌보는 자의 정상성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존재의 정상성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출산과 양육에 공공의 책임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출산과 양육에 돌봄의 자원을 모두 집중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정부의 저출생 대책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 아이를 낳지 않는 자는 돌봄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로 상상되며 국가의 미래에 생산적이지 않은 존재로 낙인찍힌다. 돌봄의 논의가 출산과 양육을 포함하여 상호의존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상성 규범에 붙들리지 않는, 시민 모두에게 도래할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2024. 7. 3.
가족구성권 연구소
국가는 ‘어떤 아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짓고 있는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이야 말로 비상사태
정부는 ‘인구국가비상사태’라는 말과 함께 다시 국민들에게 ‘결혼’하고, 그 관계 안에서 ‘출산’하고 ‘양육’을 하는 것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양육은 공동체의 책임을 원칙으로”라는 정부 대책에 적힌 한 줄처럼, 한 사회에서 새로운 구성원이 태어나고, 그가 어떤 양육자에게서 태어났는지 운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공동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정부가 말하고 있는 결혼-출산-양육-일가정양립이라는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이 인구정책의 세트구성은 오히려 어떤 양육자에게서 태어나는지에 따라 공동의 자원을 배분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오로지 운에 의해서만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부는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결혼 베네핏을 주겠다며 혼인신고 시 특별세액공제를 도입하고 자산양도에 따른 비과세 기간을 연장하는 특례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정부는 이미 2024년 1월 1일부터 혼인이나 출산을 사유로 부모나 조부모 등 직계존속으로부터 최대 1억원까지 증여받는 금액에 대해 세금을 물지 않도록 하는 법을 시행한 바 있다. 출산은 혼인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혼과 그 출산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산 형성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정부 정책의 방향은 이성애법률혼 관계가 아닌 수많은 관계들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남겨둔다. 또한 출산과 양육에 필요한 기반도 법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알아서 물려주라는 메세지를 더 강하게 던지고 있다.
주거안정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주택공급을 확대하고 신혼부부, 출산가구, 다자녀가구에게 청약요건을 완화하고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은 결국 그 분양대금을 감당할 수 있는 노동시장에서의 지속적인 생산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 애초에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존재들, 질병이 있거나 속도가 느리거나 장애가 있는 존재들은 이 확대된 분양제도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신생아특례대출의 소득기준이 한시적으로 폐지되는 것이 주거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길인가? 개별 가구들이 결국 대출을 통해서만 주거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출을 갚을 수 있는 미래소득을 전제한다. 주거 공공성이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가정양립은 결국 주거공공성으로 위장된 대출 정책을 위해 노동시장으로 노동자를 빠르게 복귀시키기 위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저출생 대책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이, 가난한 자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등록 이주민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환대받을 수 있을까? 이성애법률혼 중심의 저출생 대책은 단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정주공간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사람의 ‘정상성’을 규정한다. 이성애 정상성에는 이미 나이, 인종, 계급 등 다양한 조건의 정상성이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이혼을 할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키울 수도 있고, 친부모가 아이를 돌볼 상황이 되지 않아 위탁부모로서 아이를 돌볼 수도 있고, 조카를 돌볼 수도 있고, 친구의 아이를 함께 양육할 수도 있다. 아이가 아플 때 연락이 안되거나 올 수 없는 친권자를 찾아 발을 동동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고 있는 그 사람이 시급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행정적인 절차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가족돌봄휴가’가 아니라 ‘돌봄휴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결혼-출산-양육이라는 단선적인 생애주기를 상정하고 법적 가족만이 돌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는 돌봄 정책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생애변동성이 강해지고 돌봄에 관여하는 관계가 다양해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노동의 유연성보다 돌봄 정책의 유연성이다.
국가는 ‘어떤 아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짓고 있는가? 그 안에 장애를 가진 아이, 성소수자의 아이, 결혼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는 포함되어 있는지. 정부의 저출생 대책이 내포하고 있는 아이를 낳고 돌보는 자의 정상성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존재의 정상성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또한 출산과 양육에 공공의 책임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출산과 양육에 돌봄의 자원을 모두 집중하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정부의 저출생 대책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 아이를 낳지 않는 자는 돌봄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로 상상되며 국가의 미래에 생산적이지 않은 존재로 낙인찍힌다. 돌봄의 논의가 출산과 양육을 포함하여 상호의존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정상성 규범에 붙들리지 않는, 시민 모두에게 도래할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2024. 7. 3.
가족구성권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