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후기]2024년 7월 월례포럼: 백영경, <돌봄의 커머닝인가, 돌봄의 정치인가>

2024-07-25

2024년 7월 월례포럼 후기


제목ㅣ <돌봄의 커머닝인가, 돌봄의 정치인가>

강연ㅣ 제주대 사회학과, 백영경 교수

일시ㅣ 2024년 7월 23일 19:00

장소ㅣ 커뮤니티 늘봄

기록ㅣ 정명화 운영위원 (파니)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24. 7. 23. 백영경 님을 초대하여 <돌봄의 커머닝인가, 돌봄의 정치인가>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백영경 님은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시면서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 『돌봄이 돌보는 세계』,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등을 통해 꾸준히 한국 사회에 커먼즈와 돌봄이라는 의제를 던져오셨습니다. 이번 월례포럼 역시 그 연장선에서, ‘돌봄’이 국가의 정책이자 시장의 상품으로 유통되는 시대에 돌봄에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한 관점부터 소위 ‘돌봄’ 정책이라 여겨지는 여러 제도들이 어떻게 규범적 삶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는지까지까지 함께 짚어나가는 자리였습니다. 특히 7월 포럼에는 가족구성권연구소의 위원들뿐 아니라 사회복지연구소 물결,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구성원들도 찾아와 주셔서 각자 활동과 연구를 하면서 느낀 문제의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백영경 님은 현재 한국 사회의 ‘돌봄’ 논의에 여러 수준의 담론과 접근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한 논의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지를 꼽자면 ‘돌봄이 중요하다(그런데도 그동안 무시되어왔다)’라는 주장일 것입니다. 요즘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돌봄은 소중한 가치’라고도 하고,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나는 열심히 돌보고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표피적으로는 돌봄 담론이 확장되고 상찬된 듯 보이는 요즘, 이는 우리가 함께 ‘돌봄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표징일까요? 실질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존재에게 충분히 돌봄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 돌봄의 총량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씁쓸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백영경 님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피면서 복잡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서울시가 자녀가 있는 가정에 필리핀 가사관리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정책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야 할까요? 출생률의 지속적인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국회는 일-가정 양립, 공교육 확대에 보다 많은 예산을 배정해야 할까요?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드러내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돌봄’이란 무엇인지,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지, 이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사회적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돌봄의 사회화’ 혹은 ‘돌봄기본권’이라는 구호를 필두로 국가주도의 돌봄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돌봄을 보편적 권리의 일종으로 법제화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됩니다.


돌봄을 보편적 권리로서 보장하라는 주장에 따를 때,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되는 질문은 그 권리의 대상이 되는 ‘돌봄’의 내용입니다. 규범적 담론에서 욕망되는 삶의 모델, 즉 중산층 기준의 안락하고 좋은 삶이란 결국 ‘제국적 생활양식’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삶의 방식은 바꾸지 않은 채 단지 규범적 생활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돌봄’만을 국가가 권리의 일환으로서 보장해주려면, 결국 국가가 좀 더 싼 비용으로 ‘돌봄 서비스’를 조달하여 국민에게 공급하는 방식의 정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에서 함께 보았던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수입’해서 돌봄공백을 해결하자는 서울시의 정책이 그 예시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결국 인종적, 계급적, 지역적 부정의로 인하여 값싼 노동력으로만 여겨지는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키고, 취약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들이 본인이 속해있던 생활환경을 떠나 그간 누려온 돌봄의 자원과 관행을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전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돌봄의 총량은 늘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돌봄의 부정의가 식민주의적으로 강화되는 것이지요.


돌봄을 권리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발생하는 두 번째 문제는 권리란 그 보장의 주체가 국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기본권’, ‘권리’는 국민국가에 기초한 개념으로,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주체는 ‘국민’으로 한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통치의 대상으로서 보다 바람직하고 온전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양식, 즉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벌고 법적으로 인정되는 가족으로 관리되는 삶의 양식을 권장하고 부양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저출생 대책’은 중산층 이성애자 한국인 부부를 그 핵심 수혜자로 상정하여, 혼인신고 시 특별세액공제의 도입, 자산양도에 따른 비과세 기간 연장, 신혼부부/출산가구/다자녀 가구에 대한 청약조건 완화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 2024. 6. 19.) . 이러한 정책은 자산형성의 기회가 적거나 분양대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 결혼하지 않은 사람, 나이가 어린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미등록 이주민 등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부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이성애 법률혼 부부의 출산만을 장려하고 보조할 뿐입니다(가족구성권연구소, ‘국가는 ‘어떤 아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짓고 있는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이야 말로 비상사태’, 2024. 7. 3.). 즉 돌봄을 국가가 보장해줘야 할 권리로만 본다면, 비국민인 외국인이나 난민, 국민 중에서도 ‘온전하지 못하다/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아동-청소년, 범죄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 국가가 상정하는 돌봄 정책의 대상에서 쉽게 제외될 수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돌봄 부정의는 심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백영경 님은 돌봄을 커먼즈와 연결함으로써, 저항의 실마리를 찾아가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돌봄 그 자체의 성격에 비춰봤을 때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표준화된 국가 시스템으로 제공하기 간이한 물건과는 달리, 돌봄이란 서로가 처한 상황이나 시공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유연한 대응 속에서만 가능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백영경, ‘커먼즈와 복지’, ECO 2017년 제21권 1호, 135 내지 136면). 커먼즈가 사람들이 함께 생산하고 나누는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의 물질적, 사회적 관계를 구성해온 살림살이의 방식이라고 할 때(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빨간소금, 2024, 68면), 이러한 커먼즈라는 방식으로 돌봄에 접근함으로써 “공동체 스스로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게 돌봄의 방식을 조직하고 활용하는 사회”(백영경,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창작과비평 204호(2024년 여름호), 311면)를 구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여자들은 그간 ‘돌봄’이라는 담론의 부상 속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던 돌봄 내 위계에 대한 담론, ‘국가부양’을 ‘돌봄’으로 치환해왔던 주장에 대한 반론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데 동의를 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영경 님은 결국 지금껏 쉽게 돌봄이라고 이야기되어 왔던 것에 대해서는 그것만이 돌봄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이제껏 돌봄이 아니라고 여겨져왔던 것에 대해서는 그것 역시 돌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돌봄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돌봄노동자가 처한 구체적 현실에 대한 투쟁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뤄질 수 있음을 짚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봄정치의 출발은 구체적인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돌봄노동자 등의 노동조건 개선에서 하여야 한다는 점임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은 무엇이 이 사회에서 돌봄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대책이기 때문입니다(백영경,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318면).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그간 커머닝이라는 키워드로 권리의 언어에 갇히지 않는 사회 변화의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한 참여자는 커머닝이 실제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누가 어떻게 공동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공동의 자원을 배분하는지에 대한 결정이 필요할 될텐데, 그 결정의 과정에는 정치적 역동이 수반된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동-청소년이나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여겨지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커머닝의 장에 진입하기 위한 방식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다른 참여자는 장애인과 같이 ‘돌봄을 받는다’고만 여겨지는 사람들 역시 그간 국가가 제공하는 활동보조나 지원 정책의 서비스 제공자와 맺는 관계에서 일방적인 대상이 아닌 매순간 치열하게 협상하는 주체로 살아왔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한 장애인이 시설에 있거나 집에 있는 경우에도 여러 형태의 돌봄과 노동을 하여 왔음에도 이처럼 장애인이 행하는 돌봄은 비가시화되고 마는데, 그렇다면 ‘돌봄을 받는다’고만 여겨지는 사람들의 커머닝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백영경 님은 돌봄의 커먼즈란 결국 돌봄의 제공자를 가족으로만 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재조직화해가는 과정이며(백영경, ‘돌봄이 정치적 기획이 되려면’, 311면), 가족을 넘어선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필요한 일들을 함께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짚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상병수당의 전방위적 확대를 통해 내가 아플 때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투쟁, 법적으로 인정되는 혈연가족이 아니어도 돌봄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투쟁과 같이, 규범화된 가족 바깥의 다양한 돌봄을 장려하는 방식의 제도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설계한다면 이는 사회 전체의 돌봄을 확산하고 돌봄의 부정의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봄과 가족구성권을 커머닝하는 과정에서, ‘권리화된 돌봄’과 ‘규범화된 가족’의 연결고리를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의 관계와 돌봄이 생성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가겠다는 전망에 가슴이 부푸는 저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