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운동가 기고 칼럼]
‘주거권운동’과 ‘가족구성권운동’을 연결하고, 차별철폐 전략을 갱신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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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정(타리) | 가족구성권연구소taripink@gmail.com
1. 들어가며: 한국사회의 위기와 집과 가족
한국사회의 집과 가족은 압축적 자본주의 경제개발 기조를 확립하고 실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집과 가족이 어떻게 경제개발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왔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현장이다. 국민의 의무로서 경제개발을 위해서 노동권을 제한하며 ‘근로’하기를 강요받았고, 그걸 전제로 집이 할당되었다. ‘근로’가 가능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몸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수용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시민들의 몸을 이처럼 분할하고, 경제생산의 도구로, 경제생산에 종속되는 재생산의 도구로 남성과 여성, 어린이와 성인, 노인의 몸이 기능과 역할, 능력으로 분류되어 장소에 배치되었다. 집과 가족의 문제를 변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의 종합적인 연결 속에서 가장 변혁과 먼 장소로 생각해왔던 우리의 인식 또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1) 한국사회 위기를 제대로 호명하기
많은 이들이 주장해왔듯이 한국사회는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과 그를 위한 인구정책을 강압적으로 펼쳐냄으로써 일상생활과 관계, 삶의 재생산을 위한 시공간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사람들의 권리와 건강과 생명과 자유, 즐거움을 희생시켜왔다. 국가는 그러한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 집마련의 꿈, 중산층 진입, 자녀의 대학진학과 사회적 성공을 약속했다. 하지만 세계적 자본주의 위기속에서 한국 또한 연이은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가의 약속은 불가능하며 애초에 그렇게 분배될 수 없었던 자본주의의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런 절망속에서 자살과 자발적 고립, 각자도생, 출산하지 않음 등의 각기 다른 생존전략을 취하면서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1인가구의 증가 등 가족의 변동을 사회적 고립을 촉발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가족의 형태가 정상성/비정상성으로 규정되는 한 실제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다가갈 수 없다. [3]
“국가 전체가 소멸을 결심”했다, “한국사회가 자살하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가고 있다”는 진단 또한 제기되고 있다. 합계출산율과 자살률이 근거로 제시되고, 청년들은 노력해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없어서 희망을 잃었다고 답한다.[4]
이런 현상을 단기간의 경제위기,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수십년간 축적해온, 자본주의 체제가 배태해온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구적 차원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이 주로 생태적 차원과 사회재생산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다.[5]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적 위기’에 따라, 그동안 전유해온 여성을 중심으로 한 무상의 재생산 노동과 수탈된 자연이 이제는 더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소진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는 논의를 통해서 현재의 생명-재생산-기후의 위기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낀다. 한국사회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소진의 속도가 빠르고, 지배권력이 이에 대해 무심하고 무능하기에 무참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특징적일 것이다. 또한 이 소진상태는 “자본에 넘겨주는 무상 일의 양을 증가시킬 수 있는 역량이 고갈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소진된다. 무상 일을 넘겨줄 수 있는 잠재력이 한도를 초과하게 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소진이면서, 앞이 보이지 않기에 찾아오는 역량 고갈일 것이다. [6]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미래생명담보대출 상품”을 공약으로 만들어냈는데, 바로 신혼부부에게 1억을 10년간 대출하고, 첫째 아이를 낳으면 무이자, 둘째 아이를 낳으면 원금 절반 감면, 셋째 아이를 낳으면 원금 전액 감면을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신혼부부 생계를 지원하는 정책이 아니라 그동안 무상으로 이루어졌던 출산 행위를 통해 새롭게 화폐의 가치를 생산하려는 통화 정책(?)으로 느껴질 뿐이다. 국민의힘은 이 공약에 대해서 가족가치를 왜곡하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는데 말하는 자신들도 한심할 것이다.
2) 가족구성권 운동이 만난 ‘집 문제’
87년 체제 이후, 최소 2000년대 이후를 돌아볼 때 가족에 대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시각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가족구성권연구소(전신인 가족구성권연구모임은 2006년에 시작)는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확장된 상황에서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호주제 폐지 운동’이 성공한 이후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성평등과 여성의 경제적 참여에 대한 열망이 국가를 위한 새로운 경제성장의 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은 여성인력의 활용으로 일부 제도화되는 흐름과도 맞물렸다. ‘가족구성권운동’은 2000대 진보정당의 약진, 비혼여성, 레즈비언, 장애여성을 비롯한 새로운 여성운동의 주체 형성, 성소수자 운동과 이주민 운동의 부상, 정보인권과 사회권 운동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초기부터 [생활동반자등록법]에 대한 해외 동향을 살펴보고 입법가능성을 고민했으며, 결혼제도가 가진 억압성을 해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고, 정상/합법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정책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하면서, 제도 밖 개인들과 가족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돌보고 상호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미래를 그려왔다. [7] 지난 20여년간 파악해온 제도 안팎 개인들과 가족의 고통은 ‘집 문제’로 대표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집 문제’가 가장 고통스러운 이유는 개인들과 가족들이 따로 또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마련해야 할 물적 토대이자 매일 매일을 영위하는 생활의 단위이며, 동시에 여타의 사회정책에 비해서 처참할 정도로 공공성의 수준이 낮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집이 공공재여야 하여, 평생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도 문제없는 사회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타의 사회제도 등에 대한 인식에 비해서 낮다. 국가는 인구정책을 구사하면서 집과 가족을 최대치로 도구화했다. 한국사회의 가족은 친밀성과 돌봄, 자율적이고 사적인 시공간이기보다 경제성장을 위한 베이스캠프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자. 자본주의 체제의 인구정책으로 포섭되지 않는 개인들과 가족, 공동체를 어떻게 욕망하고 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을 사회정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몸/마음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차별과 위계를 타파하며 자유의 평등의 가치를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이미 존재하는 제도적 대안으로 단지 수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과 변화가 필요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함께 인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주거권과 연결해서 구체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대안을 상상하고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사회운동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이를 통해서 사회위기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는 사람들이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집과 가족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을까.
2. 주거권과 가족구성권 운동의 이력과 현장들
1)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을 연결하기
주거의 문제를 부동산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기본적 권리로 제기하는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정상가족의 형태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가족, 가족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소수자들의 삶이 가시화되면서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을 연결해서 고민하는 계기들이 생겨났다. 반차별 운동의 과정에서 주거권과 가족상황 차별을 함께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소수자주거권확보를 위한 틈새모임은 인권운동사랑방이 사회권 영역에 대한 고민과 깊이를 더해가던 시기에 장애여성공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등 소수자 운동과 공익변호사그룹 등이 만나서 프로젝트팀을 결성하고 주거권의 확장을 함께 모색하며 보고서를 펴냈다.[8] 개인적으로는 진보신당에서 활동할때 35세미만 1인가구에 대한 전세자금대출을 허용하라는 대중운동을 벌인 이후에 진행한 작업이다. ‘1인가구 대출요구'는 주거정책이 왜 가족형태와 나이에 따라 위계를 두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가진 계기였으나 대출불허 논리를 마주하는 순간 더이상 대출 요구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또한 과연 ‘나도 대출받게 해달라’가 주거권의 요구로 온당한가라는 질문도 갖게 되었다. 틈새모임은 주거권을 인권(사회적 권리)로서 강조하고, 국가의 책무와 비차별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가족구성권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었고,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주택 공급을 넘어선 배제와 차별, 폭력의 문제를 주거권으로 인식할 것으로 촉구했다.
국가는 인권을 존중, 보호, 실현할 의무를 진다. 존중할 의무는,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입법, 사법, 행정에 걸쳐 차별적 조치가 있거나 주거권을 침해하는 조치가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가가 개인이나 집단을 강제퇴거하거나, 주택공급이나 주택금융의 이용에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보호할 의무는, 국가가 아닌 다른 행위자가 개인이나 집단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주택의 임대차나 금융의 이용에 대해서도 인권침해나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주인이 부당하게 임대를 거부하거나 임대료를 부당한 수준으로 인상하거나 합당한 이유 없이 퇴거를 요구할 때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실현할 의무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창출할 의무다. 모든 사람들이 살만한 집에 살 수 있도록 저렴한 사회주택을 공급하거나, 토지, 주택의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각종 규제들을 시행하는 것, 도시계획이나 개발 사업이 공공의 책임 아래 지역 주민들의 인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이러한 의무에 해당한다. 일부 국가들에는 주택에 대한 청구권을 명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일정한 목표 기간을 정하고 가장 취약한 집단부터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점차 모든 사람들의 주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계획을 밝힌 것이다. 흔히 사회권은 점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예 권리적 성격을 부정당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당사국이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경로나 방식은 다양하다. 국가의 주거권 실현의무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또한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것 역시 국가의 의무다.
이렇게 주거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면서, 가족상황차별과 주거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혔다. “특히, 본 보고서는 주거권과 관련하여 가족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에 주목하고자 한다.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을 이유로 주거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이란 일반적으로, “가족 구성의 권리를 포함한 가족의 형태, 가족의 구성과정, 그리고 가족구성원 및 가족에 대한 책임과 관련한 사항”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족’이란 혼인과 혈연을 통해 맺어진 관계처럼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파트너십과 돌봄의 관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가족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이란, 이혼, 사별이나 비혼, 한부모 가족, 조손가족, 재혼가족, 동거가족, 공동생활가족, 단독가구(1인가구), 그룹홈 및 위탁가정, 동성커플가족(동성가족)처럼 가족의 형태, 가족의 구성과정 그리고 가족의 구성원 및 가족에 대한 부양, 돌봄, 지원, 가족 유대 형성, 경조사 의무 등의 책임과 관련한 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을 말한다.” [9]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 정부는 주거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실현하기는 커녕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가족상황차별에 대해서도 특별히 무관심하고 국가에 의해 차별이 조장되어 왔다. 인구정책을 위한 도구화 자체가 가족형태와 기능에 따른 차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주거 정책이 정상가족중심성을 전제로 설계되고 운영되어 왔고, “4인 가족의 내집마련”을 위해서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기반해 주거정책을 설계한다는 것은 개인의 생애주기를 규범화하고, 그에 맞출 때만 정책의 대상으로 포섭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한 차별이 발생한다.
구분 | 특성 및 내용 |
가구 형성기 | 31세: 결혼(평균 초혼 연령: 30.6세) 소득증가, 출산 |
가구 성장기 | 39~40세: 주택구매(결혼 후 주택구입: 평균 8.6년 소요) 40대 초중반: 교육비 증가, 소득증가, 주택구입 융자액 증가, 저축 증가 |
가구 안정기 | 47~50세: 주택의 교체(주택 구입 후 평균 8.5년) 56세: 퇴직, 자녀출가, 교육비 부담감소 |
가구 쇠퇴기 | 60세 이상: 주거 면적 감소, 소득감소, 가족축소 |
출처: 통계청(2004). 가구 생애주기 특성
틈새모임은 특정한 생애주기, 정상가족규범, 계층상승의 욕망이라는 세 가지가 맞물려서 진행되어왔던 현재의 주거정책은 내 집이 없고 다른 생애주기를 겪거나 가족제도에 포함되지 못하거나 장애, 인종, 성적지향, 나이, [성별] 등으로 차별 받는 소수자들의 주거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하였다.
부동산을 투자해서 자산을 형성하고, 늘리는 것이 주거안정과 노후보장의 유일한 대책이라고 여겨지도록 만든 것 또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며, 안정된 주거를 갖지 못함으로 인해서 시민권의 제약을 받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도 정책의 효과다. 주거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우범자, 요보호자, 추방자로 인식되고, 가족구성권, 노동권, 교육권 등 모든 권리에서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이후에 살펴볼 소수자 주거권 투쟁의 현장들은 주거권의 제약이 어떻게 소수자의 지위를 만들고, 가족구성권과 연결되는 삶의 재생산의 위기를 가져오는지 드러낸다. 또한 탈시설 운동, 청소년 주거권 운동, 이주민/난민의 주거권 요구가 어떻게 체제의 깊은 지점들을 건드리는지도 감각할 수 있다.
2) 장애인 탈시설 운동
장애인 탈시설 운동은 근대 국가의 시설수용 정책의 역사와 함께 한다. 일제 해방 이후 건국의 과정에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는 집을 잃고, 가장의 보호를 받기 어렵고, 생존하기 어려운 이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보호’하였다. 그러한 수용시설에는 임노동 불가능자, 부랑자, 노동 기피자, 탈가정하거나 가장이 보호를 철회한 윤락우려 여성과 우범우려 소년을 비롯해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구획되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시설 비리와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시설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성장으로 시설민주화 운동은 탈시설 운동으로 이어졌다. 2020년대에 이르러 시설폐쇄라는 명확한 지향을 제시하고 투쟁하고 있고, 정신장애인 요양시설 또한 과도한 입소기간과 탈시설 지원의 부재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탈시설 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운동의 과제 중에서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탈시설이 주거권과 가족구성권을 갱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거주시설이 주거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은 시설이 최소한의 신체적 안전을 물리적으로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외출하고 시설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 성적 즐거움을 누리고 임신출산 등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누구와 혼인하거나 동거할 것인지 전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증의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신변보조가 필요하고, 혼자서 거동이 어렵고, 의사소통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선택을 애초에 부정당할 수 없다는 선언이자 실천이다. 이는 시민권의 자격과 정상성 규범에 질문을 던지고 인간다움을 재정의한다. 시설이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위험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운동이다. 또한 시설에 수용되면 국가에서 제공하는 기초생활수급제도가 굴절된다. 시설장이 급여를 대리 수령하여 관리하는 상황[10] 인데, 이는 거주시설에서 거주인은 세대주인 원장과 동거하는 개별 세대원의 개념으로, 무연고인 경우에는 시설장에게 보호자 책임까지 주어지는 구조는 가족제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권리가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도시의 인프라(건물, 도로, 교통수단, 의사소통을 위한 접근성 등)의 필요를 공공성으로 규정하고, 마땅히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임노동이 아닌 시민공공일자리를 통한 사회참여와 소득 보장의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탈시설 이후 고립된 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이들이 많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력자들의 고민도 여전하다. 이러한 이슈는 가족구성권과 주거권에 포함되거나 그 사이에 있는 중대한 문제들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동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공공성의 영역으로 인식될 필요가 다분하다.
3) 청소년 주거권 운동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에서는 ‘정해진 거처 없이 거리생활을 유지하거나, 타인의 임시적 호의에 기대어 잠자리를 해결하거나, 보육원이나 쉼터 등 시설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르거나, 고시원이나 원룸텔 등 비적정 주거환경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 놓인 청소년들을 ‘홈리스 청소년’ 또는 ‘탈가정 청소년’이라고 정의한다. 현재 청소년을 위한 ‘보호’ 정책은 원가정 복귀와 시설 보호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가족구성권과 주거권 모두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시설생활 경험을 가진) 아동·청소년들은 시설에서의 삶은 “원하는 사람과 살 수 없고 친구도 초대하지 못하고 시설에 산다고 말할 수도 없는 완벽한 거짓말 인생”이라고 말한다.[11]
아동에 대한 양육 책임이 개인의 능력으로 수렴될 때 빈곤과 가정폭력, 일방의 방임 등으로 혼자서 자녀를 양육하기 어려운 위기에 빠진다. 유기와 방임, 폭력으로 인해서 원가족과 분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안적인 가정 양육이 우선시되지 못하는 상황이 시설화를 촉진해왔다.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온 해외입양 중심의 정책 또한 대안가정 양육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게 했다.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는 상당수의 고통과 탈가정의 요인도 가정폭력이며 탈가정 이후에 겪는 생존 불안은 이후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강제로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가족구성원들 간의 불화나 폭력으로 인해 헤어져야 할 때 취약한 상황에 있는 이들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거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책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설이 아닌 주거를 만들고, 혼자서 고립되지 않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 아동이 공백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마련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관계와 아동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 형식을 구성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공동체’, ‘마을', ‘이웃', ‘선택한 가족’, ‘양육 책임을 공유하는 주체들’과 같은 것들이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12], 공공, 공동, 공유의 개념과 실천이 어떻게 개입될 수 있을지 궁금하며, 이러한 조건을 만드는데 있어서 안정적인 주거의 확보는 필요충분 조건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분-가족제도 안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놓이는 아동(그리고 아동으로 간주되는, 시대적으로 바뀌는 이들)이 어떻게 가장(세대주)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시민인가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4) 이주민/난민의 주거와 시민권
이주민과 난민의 주거권은 현재 복잡한 비자 자격 속에서 이주민을 분할 관리하고, 난민을 심사를 통해서 극소수만 인정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결혼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이라는 기이한 이분법 속에서 마련된 이주정책은 한국의 정부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경제성장을 위한 인구관리 정책 속에서 구조화되었다. 농촌총각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시작된 결혼이주정책은 이주하는 여성들의 기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생략하고 바로 ‘다문화가족’ 단위로의 지원 정책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경우 가족결합권을 부정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도구화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난민신청자와 인도적체류지위자들의 실질적인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지역소멸이 대두되면서 지자체별로 이주노동자들의 정주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최근 나오고 있지만, 주민으로 정착하고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면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현재까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되고 있으나, 결국엔 정주할 권리와 가족구성권을 함께 논의해야 이주노동자들의 집이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주거권 운동과 가족구성권 운동이 만나 인구정책에 동원되는 기조를 비판하고자 할 때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이러한 문제의식과 결합하고, 함께 총체적인 대안을 마련해나갈 수 있는가가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가족과 집, 이주노동자의 삶, 노동, 관계가 다같이 함께 해방될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해 나갈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5) 성소수자 주거권 운동
성소수자는 가족구성권을 부정당함으로써 주거권을 확보해 나가는 데 차별을 겪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또한 청소년 성소수자의 경우 정체성을 빌미로 한 가정폭력 등의 경험을 하고, 탈가정 한 이후 성별 분리된 쉼터에 접근하기 어려워 홈리스 생활을 하게 되는 조건도 마주한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특히 트랜스젠더 퀴어들이 열악한 주거상황에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트랜스젠더 퀴어가 학력, 소득, 종사상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도 연동된다.[1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하거나 동성결혼을 법제화해서 커플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하지만 모든 성소수자가 이런 관계를 등록하길 원하지 않을 수 있고, 특히나 성애적 커플이 아닌 동거 관계 또한 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일정기간 동거한다면 가족이나 커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내가 계약자와 어떤 관계인지를 증명하지 않고서도 세입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성소수자 운동 차원에서 제기된 주거권 요구를 통해서 주거권이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거를 함께 이루고 있는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호하고, 드러내고, 정치적 대표성에 기입할 것인가를 질문하도록 했다. 이는 성적인 낙인을 받는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처하는 차별과도 연결되는데 아동에게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퀴어, 성노동자, 미혼모, 유색인, 장애인이 경험하는 것과도 겹쳐진다.
3. 시설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공공성을 재구성하기
앞서서 언급한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난민, 성소수자, 따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한부모, 홈리스 등의 집단은 공통적으로 정상가족 중심의 인구정책과 그것을 추동하기 위해서 활용된 주거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온 집단이다. 이들은 청년일때라도 결혼이 기대되지 않고, 출산양육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기를 기대받지 않거나 구조적으로 금지된 이들이다. 이들의 나이듦은 사회적인 관심사가 아니며, 가족 밖에 기댈 곳이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이들이 대체 어떻게 삶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들은 가족구성권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저항집단이다. 이들은 ‘시설사회’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정상성과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여겨지는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도시에서 밀려나고 은폐되는지를 드러냈다. 이들의 주거는 열악하고, 이들이 하는 노동은 무상으로 전유되고,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고통을 드러내기가 더욱 어렵고, 시설이나 요양병원을 유지하기 위한 몸으로 포획된다. 이러한 문제를 각자의 현장에 기반하되, 법제도와 지배질서가 구획한 문제제기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서로의 몸과 현장을 가로지르며 집과 시설, 일터와 광장의 경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동료로 만나기 위해서 공통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14]
권리의 지향과 형식을 갱신하려는 지금, 이들을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다시 구획하고 호명하면서 개별적인 권리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는 논외로 한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주거권을 요구하는 얼굴들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이들이 요구하는 것이 기존의 부동산 정책과 주거복지의 틀로는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어떻게 공통의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함께 그릴 수 있는가이다. 또한 이들의 삶과 관계와 필요가 포함된 주거권 운동이 사회 운동 전반에 제기하는 역할을 파악하고, 이들의 삶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공통의 자원과 생존 전략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여기에서는 공공성의 재구성과 연결해보려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현장들을 가로질러 홈리스와 청년, 세입자들의 현장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인식과 행동이 가능할까? 그것을 위해 공공성이라는 키워드를 갱신하고 확장해보면 어떨까? 이제 본격적으로 공공성이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영역으로서 머물지 않고, 사회적 관계와 권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낀다. 가족과 집의 문제를 다르게 사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공공성 개념을 함께 재구성하기를 제안한다. 그 재구성의 길라잡이로 이 절에선 지배적 공공성, 대항적 공공성과 같은 언어를 통해 공공성 담론과 성장 담론 간의 관계, 공공성, 국가, 기업, 시민 간의 관계, 보다 근본적으로 공공성과 공공성 영역 밖으로 쫓겨난 이들의 관계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지배적 공공성, 혹은 국가, 성장, 공공의 관계
공공성은 그 동안 사회운동을 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억압과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주 지향이자 전략으로 내세웠던 개념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한 필수적인 노동과 재화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각성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공공성 확보와 관련해 주된 논의는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것,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용을 보장하거나 공무원 신분을 가지게 하는 것, 소유와 관리의 주체를 기업이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로 하는 것 등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서 차별과 낙인으로 인해 그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배제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이 공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무엇으로 의미화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 추구 개념은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자본/자산의 증식과 모호하게 결합되어 있다. 고원은 성장담론이 공공성을 전유해왔다고 주장하며 서구에서 공과 사를 배타적으로 구성해온 것과 달리 한국사회의 경우 탈식민과정에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일변도의 국정기조는 공과 사 모두 경제성장 기조아래 식민화되었고, 신자유주의가 유입되면서 효율성으로 변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최근까지도 성장담론은 거의 항상 분배나 복지담론을 압도해왔다. 이는 성장이 하나의 강력한 공공성 담론으로 자리잡아왔음을 나타낸다.”[15]는 것이다.
한편 하승우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공공성을 약화시켰다고 진단한다. 일제 강점기에 도시는 민중을 관리하는 체제였고, 농촌은 식민지를 위한 식량기지였기 때문이다. 공설, 공립이라는 말이 그때 등장했지만 대부분 이주 일본인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19~20세기 민중 반란의 토대였던 시장과 광장과 같은 장소들을 밀어내고, 시민이 공적인 삶을 누릴 장을 대체하며 공공성을 점차 축소시켰다. 그러면서 한국의 공공성은 정부가 주민에게 베푸는 시혜성 정책으로 대체되었고, 시민이 주체적으로 함께 구성한다는 과정의 의미는 사라졌다고 진단한다. "공공성의 반대말이 민영화보다 사유화에 가깝듯, 공적인 대안도 국유화가 아닌 공유화에 가깝다." [16]
그동안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해온 탓에 공공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밀려났던 철거민은 그냥 불법적인 존재로 남겨지고, 공공사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공적인 논의에서 밀려나 타자가 되었던 주민, 시민들은 이기적인 ‘사적 개인'으로 위치지워져왔다. 통신은 사유화되었고, 전기는 공공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밀양지역에 송전탑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포기하라고 회유했던 것은 한국전력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소유도 아닌, 사적 소유도 아닌 공공의 소유가 무엇인지, 특히 주택과 관련해서 어떤 대안을 가질 수 있는지 더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2) 대항적 공공성, 혹은 공공에서 밀려난 이들의 공공성
나아가 가족이 대항적 공공성의 영역 속에서 다시 논의된다는 것은 단지 시민의 욕구를 가족화, 시장화 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가족구성권에서 주목하는 고립을 넘어선 결속과 친밀성을 통한 존재들의 출현과 의사소통 접근성의 확보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현재 혼인/혈연 관계만을 인정하고, 인구정책을 위해서 도구화되고, 중심의 가족제도 속에서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성장의 가치만큼 출산을 중요한 공공의 자산이라고 보고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 공공의 자산이 증가하는 것은 좋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몸이 성장의 도구로 동원되고 도구화되는지 볼 수 없고, 이 과정에 공공성의 개념 또한 훼손되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공공을 호명하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투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17]
지배적 공공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가가 아닌 작은 단위의 共들을 많이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태현은 ‘작은 共' 개념을 “첫째, 국가가 아니라는 의미, 둘째, 거시적 사회구조보다는 보다 미시적인 실존적 삶에 가깝다는 의미, 셋째, 공권력을 향유하기보다는 그로부터 자유로움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 특히 구성원들에 대해 억압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을 위해 외부에 대한 억압적 지배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18] 로 사용하였다. 이 개념을 통해서 가족과 공동체가 단지 사적인 관계/공간으로 공적 공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지배질서로부터 식민화되거나 경제성장을 위해 베이스캠프처럼 도구화되지 않도록 하는 대항 논리를 적극적으로 형성해 나갈 수 있다.
권리를 확립하고 보장하며, 그것을 이행하도록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면서도 국가가 결정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는 것, 하지만 단지 개인들의 선택권의 확장이 아니라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함께 만들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것, 공공성이 대중의 요구로 치환되고 포퓰리즘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에 출현하지 못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와 몫을 길어 올리는 것이 사회운동이 해 나갈 역할이라는 것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투쟁의 목표이자 전략이다. 특히 재생산권 운동을 재생산정의 운동으로 바꿔내려는 페미니스트/퀴어의 오랜 투쟁을 통해서 참조할 수 있다. 하나의 예시로서 미국 등에서는 임신중지가 일부 합법화되고, 보건 정책 안에 위치시키고,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등의 제도화를 한 뒤에도 유색인과 원주민은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정착식민주의와 노예제도가 구조화한 뿌리깊은 인종차별이 “합법화된 권리”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법을 만들고 실행하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의 기조와 정책을 특정한 방식으로 만드는 권력을 해체하고, 어떻게 하면 권리가 ‘합법’의 틀 속에서 갇힘으로써 불법화된, 타자화된 존재들을 출현시키고 공론장에서 함께 논의하고, 권리의 주체로 상호인식하고 인정할 것인가로 연결되어야 한다.
3) 우생학적 충동을 거절하는 공공성의 가능성
그간의 공공의 개념이 너무 협소해서, 서구적 맥락에서 형성된 공-사 이분법의 구도 속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어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공공에서 배제된 존재와 가치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정상이라고 여겨져 온 이들은 공공성 안에서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는가, 그러한 낙인이 공공성을 축소시키고 통치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면 대항적 공공성, 대안적 공공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공공성이 공리주의로 쉽게 이해되는 분위기에서 공공성의 가치는 우생학적 충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가? 좋아 보이지 않은 것, 다수에게 이롭게 느껴지지 않은 것, 누군가를 기분 상하게 하는 것, 낯설고 혐오스러운 것, 불필요해 보이는 것, 정말 사적으로 보이는 것, 너무나 실현하기 비용/노력이 부담스러운 것, 소수만을 위한 것…. 이런 것들은 대항과 대안의 자리에 기입될 수 있을까? 사이토 준이치는 지배적 공공권에 대항하는 것 또한 공공성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19]
그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공공성에서의 소수자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라기보다, 제도가 구획한 정체성 집단이 아니라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한,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도록 강제당하는 개인들이다. 타인에게 보여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경험을 배제당한 이들이다.[20]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집안에서, 친밀한 관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존재와 경험이 은폐되고 있는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임금 재생산 노동과 돌봄과 쾌락, 즐거움과 우정이 생존에 미치고 있는 중대한 영향들을 모두에게 접근가능한 자원이자 권리로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공공성과 관계된다. 다시 말해 기존 개념의 공공성에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영역 속에서도 공공성을 발견하는 것은 무상으로 무가치화된 것들을 다시 건져 올려서 변혁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것과 관련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집안에서, ‘가족' 안에서 상호돌봄이 가능하고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할 책임과 역할을 ‘공공적인 것’으로 구성할 때 고립되고 배제된 개인과 집단이 집과 가족안에서 존엄함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법적으로 승인된 관계만을 지원하는 질서에 도전하고, 상호돌봄과 시민들의 유대가 왜 서로의 생존뿐만 아니라 사회재생산에서도 절박한 실천인지를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생물학적 재생산을 하지 않아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비인간 동물과 상호돌봄을 지속하는 것, 비영리적 시공간을 가꾸는데 참여하는 것,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재생산이며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중요하다. ‘가족구성권’은 이러한 맥락에서 공공성을 확장하고 도전하는데 기여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가족, 시설, 관계, 국가를 떠날 권리와 떠난 이후에도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 또한 공공성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집을 배분받을 능력이나 자격으로 규제하는 현 체제에 맞서서 주거권을 인권으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 집과 가족에 대한 차별철폐 전략을 갱신하기
인구정책의 도구가 된 주거정책과 가족정책을 넘어서 집과 가족의 문제를 정치화하고, 집과 가족을 가질 능력과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이 사회의 근간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다. 생명의 위계를 나누고, 생산력에 따라 권리에 차등을 두는 지배 방식에 저항하기 위해서 집과 가족을 급진적 공공성의 전략과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주거권과 가족구성권에 대한 요구와 차별 철폐 전략 또한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도구적인 인구정책의 대표적인 정책 대상이 주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주거가 사회적인 권리가 아니라 금융자본질서를 위해 봉사하는 대출을 통해서 집을 구매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정책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회정책의 영역보다 압도적으로 대출을 중심으로 한 ‘지원' 정책과 극소수의 주거복지 정책으로 마련된 상황에서 때로 주거권의 요구는 1인가구, 청년, 동거가족, 동성커플을 위해서 분양과 대출 기회를 제공하라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연 이것이 ‘차별’인지, 어떤 차별인지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
국가와 자본은 차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생하는 차별은 장애인, 청년과 같은 제도화된 정체성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투자 가치가 있는 시민, 지불 능력이 있는 시민을 선별하고 그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배분하는 것이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위계화하는 조치들이다. 분명히 소수자 집단은 정체성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서 불평등이 누적되고, 이것이 빈곤의 구조를 함께 이룬다.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단지 문화적인 차별 효과로 한정된다고 보는 시각에 단호히 반대한다. 문제는 차별의 원인을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파악하면 전략 또한 할당조치, 우대조치, 포섭전략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이는 차별 해소 전략이 오히려 제도를 강화하고, 제도가 배태하는 배제성, 차별성을 더욱 공고히 할 위험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출 대상을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 임대아파트 가산점을 누구에게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바로 정체성 집단에 대한 차별로 설정하면 운동의 방향 또한 그것의 거울쌍이 되는 방식으로 협소화 될 수 있고, 해방의 방식이 아니며 제로섬 게임으로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문제는 정체성이 아니라 제도이다.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는 방식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요구를 정초하는 방식 모두 체제전환의 방법론으로 갱신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화된 정체성 범주가 때로 유용하고, 특정한 법제도를 수립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가가 주거권을 기본권으로서 보장하지 않고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인구집단을 선별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도화된 정체성 범주를 해체하고, 집과 가족 모두를 도구화하는 전략 자체에 맞서는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또한 분양과 대출의 대상을 확대하라는 요구 자체도 사회운동이 될 수는 없다. 다시한번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제도가 다 해낼 수 없는 공공의 영역을 최대한 늘려내고, 공공성안에 그동안 등장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수자들이 제도의 구획을 넘어 관계 맺을 수 있는 장소를 일구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1] 이 글은 지난 2월에 열린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장경섭은 한국의 개발자유주의가 경제생산과 사회재생산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압축적 근대성의 생산주의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사회정책 체제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체제의 특징으로 1) 개발 우선순위에서 배제된 부분에서 노동력의 사회재생산에 대한 공적 지원은 단호히 거부 2) 사회재생산의 책임과 비용은 최대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전가, 드물게 일어나는 공적지원 마저 사회적 임금이 아닌 비용 융자나 보조의 형태로 제공 3) 주택, 보건, 교육과 관련해 시장 상품화가 보편적으로 용인되거나 은밀하게 장려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대출이 고안되어 제공, 4) 경제생산주의나 개발주의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재생산의 특성과 내용이 임의로 조작되는 등의 형태를 지적하였다. 장경섭,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장홍경 옮김, 문학사상, 2023, 205~206쪽.
[3] 김순남은 “개인이 경험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사회에서 누가 자신의 어려움을 이웃과, 타인과 쉽게 나눌 수 있을까? 내 삶이 힘든 이유가 ‘한부모 가정'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회에서, 나의 고립이 1인 가구로 살기 때문이고, 비혼으로 살기 때문이며,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나와 이웃이 고립되지 않고, 시민과 시민으로 연결되기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면서 성별과 계급, 가족상황에 대한 정상성의 규범이 고립을 강제하는 조건임을 강조한다.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2022, 39~40쪽.
[4] 국가가 통째로 소멸을 결심했다…한국, 절망의 이유는?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055.html
[5]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장석준 옮김, 서해문집)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시스템 내부의 ‘비-경제적’ 주변 영역과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 채우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 생활 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버리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식인자본주의’로 명명한다. 그는 계급투쟁 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 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회적 재생산과 비인간 자연이 인간과 맺는 관계, 인종화된 수탈, 국가 등 정치시스템의 역할의 의미들을 포괄적으로 짚어낸다.
[6]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354-355쪽. 박이은실, “만기된 청구서의 도래와 가부장체제적 자본축적양식의 종말: 텃밭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10회 학술대회 발표문, 2023.12.23.(미간행).
[7] 가족구성권연구소, [가족을 구성할 권리, 가족을 넘어선 가족 - 가족구성권연구소 창립 기념 발간자료집 2006-2018], 2019.(미간행)
[8] 소수자주거권확보를위한 틈새모임,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 - 소수자 주거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2012.(미간행).
[9] 위 보고서, 16쪽.
[10] 기초생활보장의 급여는 수급자의 주거에서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단 수급자가 주거가 없거나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기 원하는 경우, 보장기관이 해당 수급자에 대한 급여지급 업무를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른 사회복지시설에 위탁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급여지급 업무를 위탁 받은 시설을 보장시설이라고 한다. 이에 보장시설수급자는 보장기관 및 보장비용 부담기관의 명확화, 수급자 관리의 효율성 확보를 위해 시설소재지로 수급자의 주민등록의 이전이 필요하며 보장기관은 시설수급자의 주민등록이 시설에 설정되도록 관리하여야 한다.(2021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업안내) 진은선, “탈시설 정책은 자발적 퇴소를 지원하는가?”, [시설사회, 제도화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현재와 미래] 포럼 자료집, 2021.11.16, 재인용(미간행).
[11] 정찬송, “우리의 탈시설은 모두의 지역사회 삶을 만든다”, [모두를 위한 탈시설 포럼 “우리의 탈시설은 모두의 지역사회 삶을 만든다”], 2023.5.16. 재인용. https://yhrights.notion.site/956c3d2e830f467d8d259aecb4546f6f
[12] “돌봄노동의 부담을 과중하게 져야 하는 여성들의 투쟁과, 도시민들이 공유하면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투쟁, 자연자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약화시키려는 투쟁, 금융자본의 약탈을 제어하려는 투쟁, 더 나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투쟁, 원자력발전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정체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 등은 모두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재의 사회에서 박탈당한 어떤 자원의 공유를 요구하는 커먼즈운동 속에서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중략) 공동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돌봄이 가능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가능함을, 국가나 관만이 공공성의 담지자라는 인식을 넘어 커먼즈를 확대하는 것이 곧 공공성을 확보하는 과정임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돌봄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위기를 통해 공유와 협동, 호혜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적 실천과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커먼즈를 얼마나 확대해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 비평], 통권 제177호, 2017, 32;38쪽.
[13]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 [성소수자, 주거권을 말하다]. 2021, 미발행.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 [불안한 삶과 집: 성소수자 집을 말하다- 트랜스젠더 남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2022, 미발행.
[14] 장애여성공감 기획, [시설사회], 와온, 2020.
[15] 고원, “공공성의 재구성", [황해문화], 2014 가을, 29쪽.
[16] 하승우 지음, [공공성], 책세상, 2014, 13쪽.
[17] “이 정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항쟁의 라인은, 생명의 어떠한 필요를 공공적으로 대응해야 할 욕구로 해석하는 담론과, 그러한 필요를 개인/가족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재-개인화하는' 담론 사이에 있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후자가 취하는 전략은 새로운 욕구로 해석되고 제기되는 것을 ‘가족화 및 혹은 ‘경제화'하는 것이다. 요컨데 공공적 대응을 요구하는 욕구를 가족이나 친족을 통해 충족되어야 할 것,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에서 구매해야 할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그 욕구를 다시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하는 탈-정치화의 전략이다.”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이음, 2009, 80쪽.
[18] 최태현, “公과 共의 사이에서: ‘작은 共’들의 공공성 가능성의 고찰”, [한국행정학보], 제53권 제3호, 2019, 11쪽.
[19]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 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 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등, 재해석/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중략) 대항적 공공권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중략) 자기 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이토 준이치, 위의 책, 36~39쪽.
[20] ] “고독한 삶이 제기하고 있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승인이라기보다도 존재에 대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없어져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존재의 현실성에 대한 의심은, 타인과 다른 나의 삶의 방식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존중과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나 슬픔보다 더욱 통절한 것이리라.” 사이토 준이치, 위의 책, 40쪽.
[현장운동가 기고 칼럼]
‘주거권운동’과 ‘가족구성권운동’을 연결하고, 차별철폐 전략을 갱신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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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정(타리) | 가족구성권연구소taripink@gmail.com
1. 들어가며: 한국사회의 위기와 집과 가족
한국사회의 집과 가족은 압축적 자본주의 경제개발 기조를 확립하고 실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집과 가족이 어떻게 경제개발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왔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현장이다. 국민의 의무로서 경제개발을 위해서 노동권을 제한하며 ‘근로’하기를 강요받았고, 그걸 전제로 집이 할당되었다. ‘근로’가 가능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몸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수용시설에 수용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시민들의 몸을 이처럼 분할하고, 경제생산의 도구로, 경제생산에 종속되는 재생산의 도구로 남성과 여성, 어린이와 성인, 노인의 몸이 기능과 역할, 능력으로 분류되어 장소에 배치되었다. 집과 가족의 문제를 변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의 종합적인 연결 속에서 가장 변혁과 먼 장소로 생각해왔던 우리의 인식 또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1) 한국사회 위기를 제대로 호명하기
많은 이들이 주장해왔듯이 한국사회는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과 그를 위한 인구정책을 강압적으로 펼쳐냄으로써 일상생활과 관계, 삶의 재생산을 위한 시공간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사람들의 권리와 건강과 생명과 자유, 즐거움을 희생시켜왔다. 국가는 그러한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 집마련의 꿈, 중산층 진입, 자녀의 대학진학과 사회적 성공을 약속했다. 하지만 세계적 자본주의 위기속에서 한국 또한 연이은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가의 약속은 불가능하며 애초에 그렇게 분배될 수 없었던 자본주의의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런 절망속에서 자살과 자발적 고립, 각자도생, 출산하지 않음 등의 각기 다른 생존전략을 취하면서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1인가구의 증가 등 가족의 변동을 사회적 고립을 촉발하는 원인으로 보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가족의 형태가 정상성/비정상성으로 규정되는 한 실제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다가갈 수 없다. [3]
“국가 전체가 소멸을 결심”했다, “한국사회가 자살하고 있다”, “벼락발전에서 벼락소멸로 가고 있다”는 진단 또한 제기되고 있다. 합계출산율과 자살률이 근거로 제시되고, 청년들은 노력해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없어서 희망을 잃었다고 답한다.[4]
이런 현상을 단기간의 경제위기,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수십년간 축적해온, 자본주의 체제가 배태해온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구적 차원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이 주로 생태적 차원과 사회재생산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다.[5]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적 위기’에 따라, 그동안 전유해온 여성을 중심으로 한 무상의 재생산 노동과 수탈된 자연이 이제는 더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소진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는 논의를 통해서 현재의 생명-재생산-기후의 위기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낀다. 한국사회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소진의 속도가 빠르고, 지배권력이 이에 대해 무심하고 무능하기에 무참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특징적일 것이다. 또한 이 소진상태는 “자본에 넘겨주는 무상 일의 양을 증가시킬 수 있는 역량이 고갈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소진된다. 무상 일을 넘겨줄 수 있는 잠재력이 한도를 초과하게 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소진이면서, 앞이 보이지 않기에 찾아오는 역량 고갈일 것이다. [6]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미래생명담보대출 상품”을 공약으로 만들어냈는데, 바로 신혼부부에게 1억을 10년간 대출하고, 첫째 아이를 낳으면 무이자, 둘째 아이를 낳으면 원금 절반 감면, 셋째 아이를 낳으면 원금 전액 감면을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신혼부부 생계를 지원하는 정책이 아니라 그동안 무상으로 이루어졌던 출산 행위를 통해 새롭게 화폐의 가치를 생산하려는 통화 정책(?)으로 느껴질 뿐이다. 국민의힘은 이 공약에 대해서 가족가치를 왜곡하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는데 말하는 자신들도 한심할 것이다.
2) 가족구성권 운동이 만난 ‘집 문제’
87년 체제 이후, 최소 2000년대 이후를 돌아볼 때 가족에 대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시각은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가족구성권연구소(전신인 가족구성권연구모임은 2006년에 시작)는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확장된 상황에서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호주제 폐지 운동’이 성공한 이후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성평등과 여성의 경제적 참여에 대한 열망이 국가를 위한 새로운 경제성장의 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은 여성인력의 활용으로 일부 제도화되는 흐름과도 맞물렸다. ‘가족구성권운동’은 2000대 진보정당의 약진, 비혼여성, 레즈비언, 장애여성을 비롯한 새로운 여성운동의 주체 형성, 성소수자 운동과 이주민 운동의 부상, 정보인권과 사회권 운동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초기부터 [생활동반자등록법]에 대한 해외 동향을 살펴보고 입법가능성을 고민했으며, 결혼제도가 가진 억압성을 해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고, 정상/합법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정책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하면서, 제도 밖 개인들과 가족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돌보고 상호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미래를 그려왔다. [7] 지난 20여년간 파악해온 제도 안팎 개인들과 가족의 고통은 ‘집 문제’로 대표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집 문제’가 가장 고통스러운 이유는 개인들과 가족들이 따로 또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마련해야 할 물적 토대이자 매일 매일을 영위하는 생활의 단위이며, 동시에 여타의 사회정책에 비해서 처참할 정도로 공공성의 수준이 낮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집이 공공재여야 하여, 평생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도 문제없는 사회를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여타의 사회제도 등에 대한 인식에 비해서 낮다. 국가는 인구정책을 구사하면서 집과 가족을 최대치로 도구화했다. 한국사회의 가족은 친밀성과 돌봄, 자율적이고 사적인 시공간이기보다 경제성장을 위한 베이스캠프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자. 자본주의 체제의 인구정책으로 포섭되지 않는 개인들과 가족, 공동체를 어떻게 욕망하고 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을 사회정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몸/마음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차별과 위계를 타파하며 자유의 평등의 가치를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이미 존재하는 제도적 대안으로 단지 수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과 변화가 필요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함께 인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주거권과 연결해서 구체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대안을 상상하고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사회운동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이를 통해서 사회위기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는 사람들이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집과 가족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을까.
2. 주거권과 가족구성권 운동의 이력과 현장들
1)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을 연결하기
주거의 문제를 부동산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기본적 권리로 제기하는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정상가족의 형태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가족, 가족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소수자들의 삶이 가시화되면서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을 연결해서 고민하는 계기들이 생겨났다. 반차별 운동의 과정에서 주거권과 가족상황 차별을 함께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소수자주거권확보를 위한 틈새모임은 인권운동사랑방이 사회권 영역에 대한 고민과 깊이를 더해가던 시기에 장애여성공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등 소수자 운동과 공익변호사그룹 등이 만나서 프로젝트팀을 결성하고 주거권의 확장을 함께 모색하며 보고서를 펴냈다.[8] 개인적으로는 진보신당에서 활동할때 35세미만 1인가구에 대한 전세자금대출을 허용하라는 대중운동을 벌인 이후에 진행한 작업이다. ‘1인가구 대출요구'는 주거정책이 왜 가족형태와 나이에 따라 위계를 두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가진 계기였으나 대출불허 논리를 마주하는 순간 더이상 대출 요구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또한 과연 ‘나도 대출받게 해달라’가 주거권의 요구로 온당한가라는 질문도 갖게 되었다. 틈새모임은 주거권을 인권(사회적 권리)로서 강조하고, 국가의 책무와 비차별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가족구성권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었고,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주택 공급을 넘어선 배제와 차별, 폭력의 문제를 주거권으로 인식할 것으로 촉구했다.
국가는 인권을 존중, 보호, 실현할 의무를 진다. 존중할 의무는,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며, 입법, 사법, 행정에 걸쳐 차별적 조치가 있거나 주거권을 침해하는 조치가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가가 개인이나 집단을 강제퇴거하거나, 주택공급이나 주택금융의 이용에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보호할 의무는, 국가가 아닌 다른 행위자가 개인이나 집단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주택의 임대차나 금융의 이용에 대해서도 인권침해나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주인이 부당하게 임대를 거부하거나 임대료를 부당한 수준으로 인상하거나 합당한 이유 없이 퇴거를 요구할 때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실현할 의무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창출할 의무다. 모든 사람들이 살만한 집에 살 수 있도록 저렴한 사회주택을 공급하거나, 토지, 주택의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각종 규제들을 시행하는 것, 도시계획이나 개발 사업이 공공의 책임 아래 지역 주민들의 인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이러한 의무에 해당한다. 일부 국가들에는 주택에 대한 청구권을 명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일정한 목표 기간을 정하고 가장 취약한 집단부터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점차 모든 사람들의 주거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계획을 밝힌 것이다. 흔히 사회권은 점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예 권리적 성격을 부정당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당사국이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경로나 방식은 다양하다. 국가의 주거권 실현의무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또한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것 역시 국가의 의무다.
이렇게 주거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면서, 가족상황차별과 주거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혔다. “특히, 본 보고서는 주거권과 관련하여 가족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에 주목하고자 한다.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을 이유로 주거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이란 일반적으로, “가족 구성의 권리를 포함한 가족의 형태, 가족의 구성과정, 그리고 가족구성원 및 가족에 대한 책임과 관련한 사항”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족’이란 혼인과 혈연을 통해 맺어진 관계처럼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파트너십과 돌봄의 관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가족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이란, 이혼, 사별이나 비혼, 한부모 가족, 조손가족, 재혼가족, 동거가족, 공동생활가족, 단독가구(1인가구), 그룹홈 및 위탁가정, 동성커플가족(동성가족)처럼 가족의 형태, 가족의 구성과정 그리고 가족의 구성원 및 가족에 대한 부양, 돌봄, 지원, 가족 유대 형성, 경조사 의무 등의 책임과 관련한 상황을 이유로 한 차별을 말한다.” [9]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한국 정부는 주거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실현하기는 커녕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가족상황차별에 대해서도 특별히 무관심하고 국가에 의해 차별이 조장되어 왔다. 인구정책을 위한 도구화 자체가 가족형태와 기능에 따른 차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주거 정책이 정상가족중심성을 전제로 설계되고 운영되어 왔고, “4인 가족의 내집마련”을 위해서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시민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기반해 주거정책을 설계한다는 것은 개인의 생애주기를 규범화하고, 그에 맞출 때만 정책의 대상으로 포섭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국가에 의한 차별이 발생한다.
소득증가, 출산
40대 초중반: 교육비 증가, 소득증가, 주택구입 융자액 증가, 저축 증가
56세: 퇴직, 자녀출가, 교육비 부담감소
출처: 통계청(2004). 가구 생애주기 특성
틈새모임은 특정한 생애주기, 정상가족규범, 계층상승의 욕망이라는 세 가지가 맞물려서 진행되어왔던 현재의 주거정책은 내 집이 없고 다른 생애주기를 겪거나 가족제도에 포함되지 못하거나 장애, 인종, 성적지향, 나이, [성별] 등으로 차별 받는 소수자들의 주거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하였다.
부동산을 투자해서 자산을 형성하고, 늘리는 것이 주거안정과 노후보장의 유일한 대책이라고 여겨지도록 만든 것 또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며, 안정된 주거를 갖지 못함으로 인해서 시민권의 제약을 받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도 정책의 효과다. 주거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우범자, 요보호자, 추방자로 인식되고, 가족구성권, 노동권, 교육권 등 모든 권리에서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이후에 살펴볼 소수자 주거권 투쟁의 현장들은 주거권의 제약이 어떻게 소수자의 지위를 만들고, 가족구성권과 연결되는 삶의 재생산의 위기를 가져오는지 드러낸다. 또한 탈시설 운동, 청소년 주거권 운동, 이주민/난민의 주거권 요구가 어떻게 체제의 깊은 지점들을 건드리는지도 감각할 수 있다.
2) 장애인 탈시설 운동
장애인 탈시설 운동은 근대 국가의 시설수용 정책의 역사와 함께 한다. 일제 해방 이후 건국의 과정에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는 집을 잃고, 가장의 보호를 받기 어렵고, 생존하기 어려운 이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보호’하였다. 그러한 수용시설에는 임노동 불가능자, 부랑자, 노동 기피자, 탈가정하거나 가장이 보호를 철회한 윤락우려 여성과 우범우려 소년을 비롯해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구획되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시설 비리와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시설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성장으로 시설민주화 운동은 탈시설 운동으로 이어졌다. 2020년대에 이르러 시설폐쇄라는 명확한 지향을 제시하고 투쟁하고 있고, 정신장애인 요양시설 또한 과도한 입소기간과 탈시설 지원의 부재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탈시설 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운동의 과제 중에서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탈시설이 주거권과 가족구성권을 갱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거주시설이 주거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은 시설이 최소한의 신체적 안전을 물리적으로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외출하고 시설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 성적 즐거움을 누리고 임신출산 등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누구와 혼인하거나 동거할 것인지 전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증의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신변보조가 필요하고, 혼자서 거동이 어렵고, 의사소통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선택을 애초에 부정당할 수 없다는 선언이자 실천이다. 이는 시민권의 자격과 정상성 규범에 질문을 던지고 인간다움을 재정의한다. 시설이 제공하는 ‘안전’과 ‘보호’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위험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운동이다. 또한 시설에 수용되면 국가에서 제공하는 기초생활수급제도가 굴절된다. 시설장이 급여를 대리 수령하여 관리하는 상황[10] 인데, 이는 거주시설에서 거주인은 세대주인 원장과 동거하는 개별 세대원의 개념으로, 무연고인 경우에는 시설장에게 보호자 책임까지 주어지는 구조는 가족제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권리가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도시의 인프라(건물, 도로, 교통수단, 의사소통을 위한 접근성 등)의 필요를 공공성으로 규정하고, 마땅히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임노동이 아닌 시민공공일자리를 통한 사회참여와 소득 보장의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탈시설 이후 고립된 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이들이 많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력자들의 고민도 여전하다. 이러한 이슈는 가족구성권과 주거권에 포함되거나 그 사이에 있는 중대한 문제들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동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공공성의 영역으로 인식될 필요가 다분하다.
3) 청소년 주거권 운동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에서는 ‘정해진 거처 없이 거리생활을 유지하거나, 타인의 임시적 호의에 기대어 잠자리를 해결하거나, 보육원이나 쉼터 등 시설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르거나, 고시원이나 원룸텔 등 비적정 주거환경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 놓인 청소년들을 ‘홈리스 청소년’ 또는 ‘탈가정 청소년’이라고 정의한다. 현재 청소년을 위한 ‘보호’ 정책은 원가정 복귀와 시설 보호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가족구성권과 주거권 모두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시설생활 경험을 가진) 아동·청소년들은 시설에서의 삶은 “원하는 사람과 살 수 없고 친구도 초대하지 못하고 시설에 산다고 말할 수도 없는 완벽한 거짓말 인생”이라고 말한다.[11]
아동에 대한 양육 책임이 개인의 능력으로 수렴될 때 빈곤과 가정폭력, 일방의 방임 등으로 혼자서 자녀를 양육하기 어려운 위기에 빠진다. 유기와 방임, 폭력으로 인해서 원가족과 분리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안적인 가정 양육이 우선시되지 못하는 상황이 시설화를 촉진해왔다.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온 해외입양 중심의 정책 또한 대안가정 양육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게 했다. 청소년 성소수자가 겪는 상당수의 고통과 탈가정의 요인도 가정폭력이며 탈가정 이후에 겪는 생존 불안은 이후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강제로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가족구성원들 간의 불화나 폭력으로 인해 헤어져야 할 때 취약한 상황에 있는 이들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거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책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설이 아닌 주거를 만들고, 혼자서 고립되지 않고 양육을 받아야 하는 아동이 공백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마련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관계와 아동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 형식을 구성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공동체’, ‘마을', ‘이웃', ‘선택한 가족’, ‘양육 책임을 공유하는 주체들’과 같은 것들이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12], 공공, 공동, 공유의 개념과 실천이 어떻게 개입될 수 있을지 궁금하며, 이러한 조건을 만드는데 있어서 안정적인 주거의 확보는 필요충분 조건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분-가족제도 안에서 보호의 대상으로 놓이는 아동(그리고 아동으로 간주되는, 시대적으로 바뀌는 이들)이 어떻게 가장(세대주)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시민인가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4) 이주민/난민의 주거와 시민권
이주민과 난민의 주거권은 현재 복잡한 비자 자격 속에서 이주민을 분할 관리하고, 난민을 심사를 통해서 극소수만 인정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결혼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이라는 기이한 이분법 속에서 마련된 이주정책은 한국의 정부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경제성장을 위한 인구관리 정책 속에서 구조화되었다. 농촌총각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시작된 결혼이주정책은 이주하는 여성들의 기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생략하고 바로 ‘다문화가족’ 단위로의 지원 정책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경우 가족결합권을 부정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도구화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난민신청자와 인도적체류지위자들의 실질적인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지역소멸이 대두되면서 지자체별로 이주노동자들의 정주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최근 나오고 있지만, 주민으로 정착하고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면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현재까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중심으로 문제제기가 되고 있으나, 결국엔 정주할 권리와 가족구성권을 함께 논의해야 이주노동자들의 집이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주거권 운동과 가족구성권 운동이 만나 인구정책에 동원되는 기조를 비판하고자 할 때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이러한 문제의식과 결합하고, 함께 총체적인 대안을 마련해나갈 수 있는가가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가족과 집, 이주노동자의 삶, 노동, 관계가 다같이 함께 해방될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해 나갈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5) 성소수자 주거권 운동
성소수자는 가족구성권을 부정당함으로써 주거권을 확보해 나가는 데 차별을 겪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또한 청소년 성소수자의 경우 정체성을 빌미로 한 가정폭력 등의 경험을 하고, 탈가정 한 이후 성별 분리된 쉼터에 접근하기 어려워 홈리스 생활을 하게 되는 조건도 마주한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특히 트랜스젠더 퀴어들이 열악한 주거상황에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트랜스젠더 퀴어가 학력, 소득, 종사상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과도 연동된다.[1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활동반자법]을 제정하거나 동성결혼을 법제화해서 커플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하지만 모든 성소수자가 이런 관계를 등록하길 원하지 않을 수 있고, 특히나 성애적 커플이 아닌 동거 관계 또한 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일정기간 동거한다면 가족이나 커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내가 계약자와 어떤 관계인지를 증명하지 않고서도 세입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성소수자 운동 차원에서 제기된 주거권 요구를 통해서 주거권이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주거를 함께 이루고 있는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보호하고, 드러내고, 정치적 대표성에 기입할 것인가를 질문하도록 했다. 이는 성적인 낙인을 받는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처하는 차별과도 연결되는데 아동에게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퀴어, 성노동자, 미혼모, 유색인, 장애인이 경험하는 것과도 겹쳐진다.
3. 시설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공공성을 재구성하기
앞서서 언급한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난민, 성소수자, 따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한부모, 홈리스 등의 집단은 공통적으로 정상가족 중심의 인구정책과 그것을 추동하기 위해서 활용된 주거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온 집단이다. 이들은 청년일때라도 결혼이 기대되지 않고, 출산양육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기를 기대받지 않거나 구조적으로 금지된 이들이다. 이들의 나이듦은 사회적인 관심사가 아니며, 가족 밖에 기댈 곳이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이들이 대체 어떻게 삶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들은 가족구성권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저항집단이다. 이들은 ‘시설사회’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정상성과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여겨지는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도시에서 밀려나고 은폐되는지를 드러냈다. 이들의 주거는 열악하고, 이들이 하는 노동은 무상으로 전유되고,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고통을 드러내기가 더욱 어렵고, 시설이나 요양병원을 유지하기 위한 몸으로 포획된다. 이러한 문제를 각자의 현장에 기반하되, 법제도와 지배질서가 구획한 문제제기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서로의 몸과 현장을 가로지르며 집과 시설, 일터와 광장의 경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동료로 만나기 위해서 공통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14]
권리의 지향과 형식을 갱신하려는 지금, 이들을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다시 구획하고 호명하면서 개별적인 권리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는 논외로 한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주거권을 요구하는 얼굴들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이들이 요구하는 것이 기존의 부동산 정책과 주거복지의 틀로는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어떻게 공통의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함께 그릴 수 있는가이다. 또한 이들의 삶과 관계와 필요가 포함된 주거권 운동이 사회 운동 전반에 제기하는 역할을 파악하고, 이들의 삶이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공통의 자원과 생존 전략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여기에서는 공공성의 재구성과 연결해보려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현장들을 가로질러 홈리스와 청년, 세입자들의 현장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인식과 행동이 가능할까? 그것을 위해 공공성이라는 키워드를 갱신하고 확장해보면 어떨까? 이제 본격적으로 공공성이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영역으로서 머물지 않고, 사회적 관계와 권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낀다. 가족과 집의 문제를 다르게 사유하고, 운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공공성 개념을 함께 재구성하기를 제안한다. 그 재구성의 길라잡이로 이 절에선 지배적 공공성, 대항적 공공성과 같은 언어를 통해 공공성 담론과 성장 담론 간의 관계, 공공성, 국가, 기업, 시민 간의 관계, 보다 근본적으로 공공성과 공공성 영역 밖으로 쫓겨난 이들의 관계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지배적 공공성, 혹은 국가, 성장, 공공의 관계
공공성은 그 동안 사회운동을 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억압과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주 지향이자 전략으로 내세웠던 개념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한 필수적인 노동과 재화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각성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공공성 확보와 관련해 주된 논의는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것,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용을 보장하거나 공무원 신분을 가지게 하는 것, 소유와 관리의 주체를 기업이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로 하는 것 등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서 차별과 낙인으로 인해 그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배제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이 공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무엇으로 의미화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 추구 개념은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자본/자산의 증식과 모호하게 결합되어 있다. 고원은 성장담론이 공공성을 전유해왔다고 주장하며 서구에서 공과 사를 배타적으로 구성해온 것과 달리 한국사회의 경우 탈식민과정에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일변도의 국정기조는 공과 사 모두 경제성장 기조아래 식민화되었고, 신자유주의가 유입되면서 효율성으로 변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최근까지도 성장담론은 거의 항상 분배나 복지담론을 압도해왔다. 이는 성장이 하나의 강력한 공공성 담론으로 자리잡아왔음을 나타낸다.”[15]는 것이다.
한편 하승우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공공성을 약화시켰다고 진단한다. 일제 강점기에 도시는 민중을 관리하는 체제였고, 농촌은 식민지를 위한 식량기지였기 때문이다. 공설, 공립이라는 말이 그때 등장했지만 대부분 이주 일본인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19~20세기 민중 반란의 토대였던 시장과 광장과 같은 장소들을 밀어내고, 시민이 공적인 삶을 누릴 장을 대체하며 공공성을 점차 축소시켰다. 그러면서 한국의 공공성은 정부가 주민에게 베푸는 시혜성 정책으로 대체되었고, 시민이 주체적으로 함께 구성한다는 과정의 의미는 사라졌다고 진단한다. "공공성의 반대말이 민영화보다 사유화에 가깝듯, 공적인 대안도 국유화가 아닌 공유화에 가깝다." [16]
그동안 국가가 공공성을 독점해온 탓에 공공주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밀려났던 철거민은 그냥 불법적인 존재로 남겨지고, 공공사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공적인 논의에서 밀려나 타자가 되었던 주민, 시민들은 이기적인 ‘사적 개인'으로 위치지워져왔다. 통신은 사유화되었고, 전기는 공공성이 ‘유지’되고 있지만, 밀양지역에 송전탑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포기하라고 회유했던 것은 한국전력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소유도 아닌, 사적 소유도 아닌 공공의 소유가 무엇인지, 특히 주택과 관련해서 어떤 대안을 가질 수 있는지 더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2) 대항적 공공성, 혹은 공공에서 밀려난 이들의 공공성
나아가 가족이 대항적 공공성의 영역 속에서 다시 논의된다는 것은 단지 시민의 욕구를 가족화, 시장화 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가족구성권에서 주목하는 고립을 넘어선 결속과 친밀성을 통한 존재들의 출현과 의사소통 접근성의 확보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현재 혼인/혈연 관계만을 인정하고, 인구정책을 위해서 도구화되고, 중심의 가족제도 속에서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성장의 가치만큼 출산을 중요한 공공의 자산이라고 보고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 공공의 자산이 증가하는 것은 좋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몸이 성장의 도구로 동원되고 도구화되는지 볼 수 없고, 이 과정에 공공성의 개념 또한 훼손되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공공을 호명하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투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17]
지배적 공공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가가 아닌 작은 단위의 共들을 많이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태현은 ‘작은 共' 개념을 “첫째, 국가가 아니라는 의미, 둘째, 거시적 사회구조보다는 보다 미시적인 실존적 삶에 가깝다는 의미, 셋째, 공권력을 향유하기보다는 그로부터 자유로움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 특히 구성원들에 대해 억압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을 위해 외부에 대한 억압적 지배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18] 로 사용하였다. 이 개념을 통해서 가족과 공동체가 단지 사적인 관계/공간으로 공적 공간과 대비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지배질서로부터 식민화되거나 경제성장을 위해 베이스캠프처럼 도구화되지 않도록 하는 대항 논리를 적극적으로 형성해 나갈 수 있다.
권리를 확립하고 보장하며, 그것을 이행하도록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면서도 국가가 결정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는 것, 하지만 단지 개인들의 선택권의 확장이 아니라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조건을 함께 만들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것, 공공성이 대중의 요구로 치환되고 포퓰리즘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에 출현하지 못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와 몫을 길어 올리는 것이 사회운동이 해 나갈 역할이라는 것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투쟁의 목표이자 전략이다. 특히 재생산권 운동을 재생산정의 운동으로 바꿔내려는 페미니스트/퀴어의 오랜 투쟁을 통해서 참조할 수 있다. 하나의 예시로서 미국 등에서는 임신중지가 일부 합법화되고, 보건 정책 안에 위치시키고,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등의 제도화를 한 뒤에도 유색인과 원주민은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정착식민주의와 노예제도가 구조화한 뿌리깊은 인종차별이 “합법화된 권리”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법을 만들고 실행하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의 기조와 정책을 특정한 방식으로 만드는 권력을 해체하고, 어떻게 하면 권리가 ‘합법’의 틀 속에서 갇힘으로써 불법화된, 타자화된 존재들을 출현시키고 공론장에서 함께 논의하고, 권리의 주체로 상호인식하고 인정할 것인가로 연결되어야 한다.
3) 우생학적 충동을 거절하는 공공성의 가능성
그간의 공공의 개념이 너무 협소해서, 서구적 맥락에서 형성된 공-사 이분법의 구도 속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어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공공에서 배제된 존재와 가치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정상이라고 여겨져 온 이들은 공공성 안에서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는가, 그러한 낙인이 공공성을 축소시키고 통치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면 대항적 공공성, 대안적 공공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공공성이 공리주의로 쉽게 이해되는 분위기에서 공공성의 가치는 우생학적 충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가? 좋아 보이지 않은 것, 다수에게 이롭게 느껴지지 않은 것, 누군가를 기분 상하게 하는 것, 낯설고 혐오스러운 것, 불필요해 보이는 것, 정말 사적으로 보이는 것, 너무나 실현하기 비용/노력이 부담스러운 것, 소수만을 위한 것…. 이런 것들은 대항과 대안의 자리에 기입될 수 있을까? 사이토 준이치는 지배적 공공권에 대항하는 것 또한 공공성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19]
그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공공성에서의 소수자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라기보다, 제도가 구획한 정체성 집단이 아니라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한,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도록 강제당하는 개인들이다. 타인에게 보여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경험을 배제당한 이들이다.[20]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집안에서, 친밀한 관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존재와 경험이 은폐되고 있는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임금 재생산 노동과 돌봄과 쾌락, 즐거움과 우정이 생존에 미치고 있는 중대한 영향들을 모두에게 접근가능한 자원이자 권리로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공공성과 관계된다. 다시 말해 기존 개념의 공공성에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영역 속에서도 공공성을 발견하는 것은 무상으로 무가치화된 것들을 다시 건져 올려서 변혁적인 것으로 구성하는 것과 관련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집안에서, ‘가족' 안에서 상호돌봄이 가능하고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할 책임과 역할을 ‘공공적인 것’으로 구성할 때 고립되고 배제된 개인과 집단이 집과 가족안에서 존엄함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법적으로 승인된 관계만을 지원하는 질서에 도전하고, 상호돌봄과 시민들의 유대가 왜 서로의 생존뿐만 아니라 사회재생산에서도 절박한 실천인지를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생물학적 재생산을 하지 않아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비인간 동물과 상호돌봄을 지속하는 것, 비영리적 시공간을 가꾸는데 참여하는 것,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재생산이며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중요하다. ‘가족구성권’은 이러한 맥락에서 공공성을 확장하고 도전하는데 기여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가족, 시설, 관계, 국가를 떠날 권리와 떠난 이후에도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 또한 공공성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집을 배분받을 능력이나 자격으로 규제하는 현 체제에 맞서서 주거권을 인권으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 집과 가족에 대한 차별철폐 전략을 갱신하기
인구정책의 도구가 된 주거정책과 가족정책을 넘어서 집과 가족의 문제를 정치화하고, 집과 가족을 가질 능력과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이 사회의 근간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다. 생명의 위계를 나누고, 생산력에 따라 권리에 차등을 두는 지배 방식에 저항하기 위해서 집과 가족을 급진적 공공성의 전략과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주거권과 가족구성권에 대한 요구와 차별 철폐 전략 또한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도구적인 인구정책의 대표적인 정책 대상이 주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주거가 사회적인 권리가 아니라 금융자본질서를 위해 봉사하는 대출을 통해서 집을 구매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정책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회정책의 영역보다 압도적으로 대출을 중심으로 한 ‘지원' 정책과 극소수의 주거복지 정책으로 마련된 상황에서 때로 주거권의 요구는 1인가구, 청년, 동거가족, 동성커플을 위해서 분양과 대출 기회를 제공하라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연 이것이 ‘차별’인지, 어떤 차별인지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
국가와 자본은 차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생하는 차별은 장애인, 청년과 같은 제도화된 정체성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투자 가치가 있는 시민, 지불 능력이 있는 시민을 선별하고 그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배분하는 것이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위계화하는 조치들이다. 분명히 소수자 집단은 정체성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서 불평등이 누적되고, 이것이 빈곤의 구조를 함께 이룬다. 정체성에 따른 차별이 단지 문화적인 차별 효과로 한정된다고 보는 시각에 단호히 반대한다. 문제는 차별의 원인을 제도화된 정체성으로 파악하면 전략 또한 할당조치, 우대조치, 포섭전략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이는 차별 해소 전략이 오히려 제도를 강화하고, 제도가 배태하는 배제성, 차별성을 더욱 공고히 할 위험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출 대상을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 임대아파트 가산점을 누구에게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바로 정체성 집단에 대한 차별로 설정하면 운동의 방향 또한 그것의 거울쌍이 되는 방식으로 협소화 될 수 있고, 해방의 방식이 아니며 제로섬 게임으로 왜곡될 수 있다. 그래서 문제는 정체성이 아니라 제도이다.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는 방식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요구를 정초하는 방식 모두 체제전환의 방법론으로 갱신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화된 정체성 범주가 때로 유용하고, 특정한 법제도를 수립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국가가 주거권을 기본권으로서 보장하지 않고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인구집단을 선별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도화된 정체성 범주를 해체하고, 집과 가족 모두를 도구화하는 전략 자체에 맞서는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또한 분양과 대출의 대상을 확대하라는 요구 자체도 사회운동이 될 수는 없다. 다시한번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제도가 다 해낼 수 없는 공공의 영역을 최대한 늘려내고, 공공성안에 그동안 등장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수자들이 제도의 구획을 넘어 관계 맺을 수 있는 장소를 일구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1] 이 글은 지난 2월에 열린 체제전환운동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장경섭은 한국의 개발자유주의가 경제생산과 사회재생산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압축적 근대성의 생산주의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사회정책 체제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체제의 특징으로 1) 개발 우선순위에서 배제된 부분에서 노동력의 사회재생산에 대한 공적 지원은 단호히 거부 2) 사회재생산의 책임과 비용은 최대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전가, 드물게 일어나는 공적지원 마저 사회적 임금이 아닌 비용 융자나 보조의 형태로 제공 3) 주택, 보건, 교육과 관련해 시장 상품화가 보편적으로 용인되거나 은밀하게 장려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대출이 고안되어 제공, 4) 경제생산주의나 개발주의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재생산의 특성과 내용이 임의로 조작되는 등의 형태를 지적하였다. 장경섭,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장홍경 옮김, 문학사상, 2023, 205~206쪽.
[3] 김순남은 “개인이 경험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사회에서 누가 자신의 어려움을 이웃과, 타인과 쉽게 나눌 수 있을까? 내 삶이 힘든 이유가 ‘한부모 가정'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회에서, 나의 고립이 1인 가구로 살기 때문이고, 비혼으로 살기 때문이며,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나와 이웃이 고립되지 않고, 시민과 시민으로 연결되기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면서 성별과 계급, 가족상황에 대한 정상성의 규범이 고립을 강제하는 조건임을 강조한다.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오월의봄, 2022, 39~40쪽.
[4] 국가가 통째로 소멸을 결심했다…한국, 절망의 이유는?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055.html
[5]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길](장석준 옮김, 서해문집)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시스템 내부의 ‘비-경제적’ 주변 영역과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 채우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 생활 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버리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식인자본주의’로 명명한다. 그는 계급투쟁 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접합 부위마다 벌어지는 경계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회적 재생산과 비인간 자연이 인간과 맺는 관계, 인종화된 수탈, 국가 등 정치시스템의 역할의 의미들을 포괄적으로 짚어낸다.
[6]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354-355쪽. 박이은실, “만기된 청구서의 도래와 가부장체제적 자본축적양식의 종말: 텃밭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제10회 학술대회 발표문, 2023.12.23.(미간행).
[7] 가족구성권연구소, [가족을 구성할 권리, 가족을 넘어선 가족 - 가족구성권연구소 창립 기념 발간자료집 2006-2018], 2019.(미간행)
[8] 소수자주거권확보를위한 틈새모임, [주거권과 가족상황차별 - 소수자 주거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2012.(미간행).
[9] 위 보고서, 16쪽.
[10] 기초생활보장의 급여는 수급자의 주거에서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단 수급자가 주거가 없거나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기 원하는 경우, 보장기관이 해당 수급자에 대한 급여지급 업무를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른 사회복지시설에 위탁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이 급여지급 업무를 위탁 받은 시설을 보장시설이라고 한다. 이에 보장시설수급자는 보장기관 및 보장비용 부담기관의 명확화, 수급자 관리의 효율성 확보를 위해 시설소재지로 수급자의 주민등록의 이전이 필요하며 보장기관은 시설수급자의 주민등록이 시설에 설정되도록 관리하여야 한다.(2021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업안내) 진은선, “탈시설 정책은 자발적 퇴소를 지원하는가?”, [시설사회, 제도화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현재와 미래] 포럼 자료집, 2021.11.16, 재인용(미간행).
[11] 정찬송, “우리의 탈시설은 모두의 지역사회 삶을 만든다”, [모두를 위한 탈시설 포럼 “우리의 탈시설은 모두의 지역사회 삶을 만든다”], 2023.5.16. 재인용. https://yhrights.notion.site/956c3d2e830f467d8d259aecb4546f6f
[12] “돌봄노동의 부담을 과중하게 져야 하는 여성들의 투쟁과, 도시민들이 공유하면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투쟁, 자연자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약화시키려는 투쟁, 금융자본의 약탈을 제어하려는 투쟁, 더 나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투쟁, 원자력발전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정체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 등은 모두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재의 사회에서 박탈당한 어떤 자원의 공유를 요구하는 커먼즈운동 속에서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중략) 공동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돌봄이 가능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가능함을, 국가나 관만이 공공성의 담지자라는 인식을 넘어 커먼즈를 확대하는 것이 곧 공공성을 확보하는 과정임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돌봄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위기를 통해 공유와 협동, 호혜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적 실천과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커먼즈를 얼마나 확대해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 비평], 통권 제177호, 2017, 32;38쪽.
[13]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 [성소수자, 주거권을 말하다]. 2021, 미발행.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 [불안한 삶과 집: 성소수자 집을 말하다- 트랜스젠더 남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2022, 미발행.
[14] 장애여성공감 기획, [시설사회], 와온, 2020.
[15] 고원, “공공성의 재구성", [황해문화], 2014 가을, 29쪽.
[16] 하승우 지음, [공공성], 책세상, 2014, 13쪽.
[17] “이 정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항쟁의 라인은, 생명의 어떠한 필요를 공공적으로 대응해야 할 욕구로 해석하는 담론과, 그러한 필요를 개인/가족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재-개인화하는' 담론 사이에 있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후자가 취하는 전략은 새로운 욕구로 해석되고 제기되는 것을 ‘가족화 및 혹은 ‘경제화'하는 것이다. 요컨데 공공적 대응을 요구하는 욕구를 가족이나 친족을 통해 충족되어야 할 것, 스스로의 힘으로 시장에서 구매해야 할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그 욕구를 다시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하는 탈-정치화의 전략이다.”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이음, 2009, 80쪽.
[18] 최태현, “公과 共의 사이에서: ‘작은 共’들의 공공성 가능성의 고찰”, [한국행정학보], 제53권 제3호, 2019, 11쪽.
[19]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 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 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등, 재해석/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중략) 대항적 공공권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중략) 자기 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이토 준이치, 위의 책, 36~39쪽.
[20] ] “고독한 삶이 제기하고 있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승인이라기보다도 존재에 대한 긍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없어져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존재의 현실성에 대한 의심은, 타인과 다른 나의 삶의 방식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존중과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나 슬픔보다 더욱 통절한 것이리라.” 사이토 준이치, 위의 책,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