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나영 운영위원은 가톨릭평론 44호(2024 여름)에 "가족 밖에서, 단절과 연결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라는 제목으로 기고했습니다. 원문의 일부를 공유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상략)
서로 의존하며 상호돌봄으로 연결되는 삶
돌봄을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의존과 돌봄 사이는 꼬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서로를 존중해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도 않는다. 서로 너무 잘 알기에 친밀한 통제가 발생하듯이 돌봄은 긴장감이 많이 필요한 피곤함을 동반하는 일이다. 돌봄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끊임 없이 소통하고 조율해야 일방적인 관계, 주도권이 뻬앗기는 관계를 아주 조금이나마 경계할 수 있다. 장애여성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몸 닿기, 일상 알기 등 원치 않게 포함되고 이탈하는 경험과 부딪히는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만큼, 이것이 왜 힘들고 어려운 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한다. 돌봄이 전통가족과 시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굳혀진 관념과 국가가 차단한 돌봄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작은 틈새를 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의 이미 모여진 경험들이 더 많이 풀어지고 더 많이 꼬인 선들에 자꾸만 걸려 넘어지는 돌봄의 복잡한 모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기대한다.
장애여성들의 단절은 가족관계라는 밀접함을 느슨함으로 만드는 공동의 도전이다. 장애여성들이 잘 의존하는 관계, 기존에 맺는 것과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느린 시간이 필요하다. 이 느린 시간 자체가 자본의 속도가 누구의 기준인지를 질문한다. 돌봄을 사회서비스로만 이해하고, 시설이 마치 선택지인 것처럼 만드는 상황에서 국가가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돌봄의 납작한 단면들이 매끄러울 수 없는 일상적인 돌봄의 굴곡에 부딪혀 갈라지게 될 때 우리는 더 많은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삶의 전략을 만드는 관계 속에 빠지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함께 내는 용기의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다. 본인이 죽으면 동료들이 장례를 지내주면 좋겠다는 장공감 회원의 말처럼 가족이 아니더라도 나를 기억하고 장례를 치루어 줄 사람, 내가 알지 못해도 나와 연결되어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기억하는 서로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삶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는 것은 친밀하지 않아도 느슨하게 꾸준한 네트워크를 욕망하는 일이며, 익숙해도 여전히 낯설고 떨리는 관계들을 가지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 권리임을 용기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고나영 운영위원은 가톨릭평론 44호(2024 여름)에 "가족 밖에서, 단절과 연결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라는 제목으로 기고했습니다. 원문의 일부를 공유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상략)
서로 의존하며 상호돌봄으로 연결되는 삶
돌봄을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의존과 돌봄 사이는 꼬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서로를 존중해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도 않는다. 서로 너무 잘 알기에 친밀한 통제가 발생하듯이 돌봄은 긴장감이 많이 필요한 피곤함을 동반하는 일이다. 돌봄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끊임 없이 소통하고 조율해야 일방적인 관계, 주도권이 뻬앗기는 관계를 아주 조금이나마 경계할 수 있다. 장애여성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몸 닿기, 일상 알기 등 원치 않게 포함되고 이탈하는 경험과 부딪히는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만큼, 이것이 왜 힘들고 어려운 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한다. 돌봄이 전통가족과 시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굳혀진 관념과 국가가 차단한 돌봄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작은 틈새를 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의 이미 모여진 경험들이 더 많이 풀어지고 더 많이 꼬인 선들에 자꾸만 걸려 넘어지는 돌봄의 복잡한 모습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기대한다.
장애여성들의 단절은 가족관계라는 밀접함을 느슨함으로 만드는 공동의 도전이다. 장애여성들이 잘 의존하는 관계, 기존에 맺는 것과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느린 시간이 필요하다. 이 느린 시간 자체가 자본의 속도가 누구의 기준인지를 질문한다. 돌봄을 사회서비스로만 이해하고, 시설이 마치 선택지인 것처럼 만드는 상황에서 국가가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돌봄의 납작한 단면들이 매끄러울 수 없는 일상적인 돌봄의 굴곡에 부딪혀 갈라지게 될 때 우리는 더 많은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삶의 전략을 만드는 관계 속에 빠지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함께 내는 용기의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다. 본인이 죽으면 동료들이 장례를 지내주면 좋겠다는 장공감 회원의 말처럼 가족이 아니더라도 나를 기억하고 장례를 치루어 줄 사람, 내가 알지 못해도 나와 연결되어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기억하는 서로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삶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는 것은 친밀하지 않아도 느슨하게 꾸준한 네트워크를 욕망하는 일이며, 익숙해도 여전히 낯설고 떨리는 관계들을 가지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 권리임을 용기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