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우리 사회에서 친밀성과 가족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혼인평등이나 생활동반자등록법 운동 등 법적으로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는 현재 법적 논의들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가족정치-가족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이 가족을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살고 유대를 맺고 상호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재생산 정의’를 향한 사회권 실현과 만나야 함을 논의하고자 한다.
더 이상 이전의 가족질서로 돌아갈 수 없다
지난 4월 26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국회의원 주도로 생활동반자법이 국회 최초로 발의되었고, 이어 5월 31일에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로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되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동반자법이 공약으로 등장했다. 2014년 진선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을 추진했지만 일부 반대 여론을 의식하고 의지를 꺾은 이후로, 마침내 올해 이루어진 발의는 헌정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정상가족 너머의 삶’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진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여전히 법적인 가족의 정의가 협소해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맺고 의지하는 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과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은 국가의 법 보호 밖에서 존재해 온 성소수자를 포함한 ‘비국민’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이 강화된 시기만이 아니라, 가족제도의 불평등을 폐지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전면에 등장해 온 시기이기도 하다.
탈시설 운동, 청소년/퀴어의 탈가정/탈학교 움직임, 성소수자/청소년 주거권 운동,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트랜스젠더/퀴어 운동 등 여러 방향에서 기존의 가족제도를 떠난 시민들이 새로운 소속, 관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가족을 구성할 권리, 가족을 넘어선 가족” 가족구성권연구소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필자(가운데) 모습.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 상황 차별을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활동을 펴오고 있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제공 사진) |
또한, 비혼의 장기화/지속화, 1인가구의 급격한 증가가 진행되었고, 노년에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가치의 변화와 더불어, 코로나19 재난 시기를 거치면서 돌봄과 양육에 대한 사회화에 대한 요구들이 전례 없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흐름들은 더이상 이전의 가족질서로 돌아갈 수 없는, 그것에 기반을 둔 삶의 재생산은 불가능함을 인지하는 시민들의 출현과 만난다.
기존 가족제도를 떠난 새로운 주체들 등장
비혼∙1인가구의 증가,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은 노년인구 ∙∙∙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게 하는 사회에서, 삶의 미래라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사회에 이로운 시민과 아닌 시민을 구분하면서, 사회에 ‘이롭지’ 않다고 간주되는 시민들은 가족을 만들 수도, 만들어서도 안되는 존재로 간주해왔다. 즉,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시민의 삶과 연결시켜왔고,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 수 없는 퀴어나 장애가 있는 시민들, 가난한 시민들은 이상적인 시민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차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정당화 해왔다.
이러한 사회에서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시민들은 ‘가족만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태도를 취했다. 장시간의 노동을 견디면서 일하고, 가족중심의 돌봄노동을 통해서 가족끼리의 생존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간주했다. 이토록 가족끼리 생존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 해온,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의 결과는 현재 어떠한가?
노인빈곤율 OECD 국가 중 1위, OECD 평균 자살율보다 2배 이상 자살율 높은 나라, 저출생 세계 1위이다. 또한 국제협력개발기구 OECD 에서 38 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더 나은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조사 중 ‘내가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척이나 친구, 이웃이 있는지’ 묻는 공동체 연대성(Quality of Support network)에 관한 질문에서 한국은 2019~2021년 평균 38개국 중 38위였다.(참고 “[삶의 질 보고서] 한국인 만족도, OECD 꼴찌서 세번째…콜롬비아 수준”, 아주경제 2023. 2. 20)
이렇듯, 개인이 경험하는 불평등이나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게 하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없음’의 상태는 퀴어, 장애인, 여성, 가난한 사람들, 이주자 등 소수자만이 느끼고 있는 게 아니다. 미래는 특정한 계급이나 자원이 있는 시민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많은 시민들 또한 체감하고 있다.
누구랑 의지하고, 서로를 돌볼 것인가
사회적인 모델 부재,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
이 실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사회적인 징후로 보고 접근할 것인가? 지금의 결과는 사회적인 유대와 연대의 부재이며, 기존 가족을 넘어서 상호의존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이 취약한 사회임을 의미한다.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고, 생존을 맡길 수 있는 가족이 없으면 사회적인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상실한 것은 사회적인 유대이며, 연대의 가치들이다.
사회적 재생산은 돌봄, 휴식, 관계에서의 소속감, 세대 재생산, 행복의 의미, 소속감 등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러한 필수적인 가치들을 가족에게 일차적으로 일임해왔다.
▲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 마저 누군가에게는 투쟁의 영역이 된다.”(김순남) 작년 8월 12일, 2022 홈리스추모제 추모팀(나눔과나눔, 동자동사랑방, 조계종사회노동위원회, 화우공익재단,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이 공동주최한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 가족대신 장례] 시민사회단체 워크숍에 참여한 필자의 모습. 공영장례제도의 현재와 한계, 앞으로의 과제를 짚는 자리였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제공 사진) |
시민들이 내가 누구랑 의지하고, 서로를 돌보고, 어디에서 머물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적인 모델이 부재한 사회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김현미,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 문화』 제13권 2호)
이렇듯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전면화되고 있고, 한편으로 기존 가족을 떠나서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가족구성권 운동의 새로운 시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회적 재생산 모델을 찾아가기 위해서 정치적이고 변혁적인 의제들을 교차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기라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회적 재생산 모델은 기존 가족중심의 가족질서 ‘안’에서 생존과 소속감과 돌봄을 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의 확장을 통해서 기존 가족 너머에서 돌봄과 상호의존을 확장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가족 상황과 무관하게 개인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삶이 재생산 될 수 없는 조건들을 ‘불평등’의 문제로 가시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사회적인 자원들-계급, 나이, 섹슈얼리티, 성별정체성, 여성, 장애, 이주. 싱글맘 등-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은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성소수자 집단만 보아도 그렇다.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내가 누구랑 접속하고,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지에 따라서,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이나 생존전략 등이 단일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해 이주를 하거나, 해외에서 동성결혼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을 하면서 ‘인정투쟁’에 개입하는 흐름들이 가시화되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일찍 집을 떠나서 탈가정한 ‘시민’으로 살아가느라 생존이 어려운 청소년 혹은 퀴어들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취약한 세계 속에서 서로 유대를 맺고 생존하면서, 커플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만들고 돌봄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퀴어들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배우자 혹은 동반자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 개입하여 바꾸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원 가족 안에 돌봄과 생존을 맡기는 가족제도 자체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며, 가족을 떠나서도 살아갈 수 있는 분배의 정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시사점을 제기한다.
배우자, 커플 중심 관계에서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 관계망으로
양육∙돌봄을 중요한 공적 영역으로 바꿔내야
자본축적이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는 시민만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거나, 이들에게만 시민으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가족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동반자를 선택하고, 의지할 수 있고, 충분한 돌봄과 상호의존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가족을 정치화하는 실천이며, 사회적인 연대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에서 ‘우선 순위를 바꾸는 정치’가 기존 자본주의의 사회질서를 바꾸어내는 정치적인 의제임을 언급하면서, 양육과 돌봄 등을 중요한 공적인 영역으로 바꾸어내는 것을 변혁의 과정으로 언급한다. 누군가를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가족 안의 이슈도 아니고,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책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참조)
이는 도구적인 인구정책을 넘어서, 기존 가족 단위로 삶의 재생산을 일임해온 사회에 개입하는 ‘사회적 재생산 정의’를 실천하는 장과 연결된다. 사회적 재생산 정의는 삶이 이어지는데 필수적인 소속감, 유대, 상호협조 등과 관련해 ‘가족중심, 혈연중심으로 삶이 재생산된다’고 간주하는 사회에 개입하는 것이다. 시민 누구나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의 순위가 민법 779조(가족의 범위)에 따라서-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등-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사회적인 의제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적 재생산 정의를 실천하는 장은 ‘퀴어가족정치’의 장과 만난다.
▲ 김순남 저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앞뒤 표지 이미지. (오월의봄, 2022) |
기존 가족제도를 떠나서도 삶이 재생산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상상하라
퀴어가족정치의 장, 새로운 상호의존의 가능성 모색
이러한 지점에서, 사회적 재생산 정의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맺고 있는 소중한 관계의 순위가 민법 779조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폐쇄적인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불평등한 가족제도를 재구성하면서,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사회적인 의제로 정치화하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과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존 가족 ‘안’에서의 돌봄, 유대, 의존적인 삶을 당연시하지 않고, 기존 가족제도를 떠나서도 삶이 재생산될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를 확보하고자 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을 ‘퀴어가족정치의 장’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퀴어가족정치는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이나 불평등만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질서에서 불평등으로 연결된 많은 시민의 삶을, 그리고 그러한 삶들의 연결고리를 의제화하는 것이며,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로서 제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관계성들을 의미화하면서 새로운 상호의존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이다.”(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14쪽. 오월의 봄, 2022)
이러한 지점에서, 퀴어가족정치는 혼인평등 운동이나 생활동반자법을 통해 법적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가족정치의 핵심적인 의제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족정치가 성별이분법을 해체하는지, 시민적인 유대와 돌봄의 관계망을 확대하는지, 다양한 차별에 기반한 위계적인 관계의 문법을 해체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사회권을 교차적으로 연결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천이다. 퀴어가족정치는 법적으로 가족으로 인정되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가족을 불평등의 의제로 삼으며, 노동, 빈곤, 성차별 등 여러 의제들을 교차적으로 정치화하면서 새로운 삶의 정치학을 모색하는 실천이다.
사회적 재생산 위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이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연대를 확장할지, 그리고 어떤 차별이 중요한 의제로 놓여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쉽지 않는 국면에 놓여 있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혼인평등 운동이나 생활동반자관계를 위한 가족구성권 운동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공적으로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서 경험하는 차별이나 고통해소뿐만 아니라 기존 가족을 넘어서 사회적인 유대와 연대의 확장을 모색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필자 소개] 김순남. 가족 상황 차별을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여성학 박사를 마치고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젠더 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음. 주요 저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 『다시 쓰는 여성학』(공저), 『시설사회』(공저),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등.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06년 7월 13일, 당시 민주노동당의 제안으로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으로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장애여성공감, 언니네트워크, 여러 퀴어/페미니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함께했고, 이후 사회복지연구소 물결도 합류했다. 2019년 1월 24일 연구소로 전환하였으며,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 일다(2023.07.05.일자) 🔗 원문 보기
[연재 소개] 우리 사회에서 친밀성과 가족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혼인평등이나 생활동반자등록법 운동 등 법적으로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는 현재 법적 논의들이 다루지 못하고 있는 가족정치-가족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이 가족을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살고 유대를 맺고 상호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재생산 정의’를 향한 사회권 실현과 만나야 함을 논의하고자 한다.
더 이상 이전의 가족질서로 돌아갈 수 없다
지난 4월 26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국회의원 주도로 생활동반자법이 국회 최초로 발의되었고, 이어 5월 31일에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로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되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동반자법이 공약으로 등장했다. 2014년 진선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을 추진했지만 일부 반대 여론을 의식하고 의지를 꺾은 이후로, 마침내 올해 이루어진 발의는 헌정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정상가족 너머의 삶’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진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여전히 법적인 가족의 정의가 협소해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맺고 의지하는 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과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은 국가의 법 보호 밖에서 존재해 온 성소수자를 포함한 ‘비국민’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이 강화된 시기만이 아니라, 가족제도의 불평등을 폐지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전면에 등장해 온 시기이기도 하다.
탈시설 운동, 청소년/퀴어의 탈가정/탈학교 움직임, 성소수자/청소년 주거권 운동,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트랜스젠더/퀴어 운동 등 여러 방향에서 기존의 가족제도를 떠난 시민들이 새로운 소속, 관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가족을 구성할 권리, 가족을 넘어선 가족” 가족구성권연구소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필자(가운데) 모습.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 상황 차별을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활동을 펴오고 있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제공 사진)
또한, 비혼의 장기화/지속화, 1인가구의 급격한 증가가 진행되었고, 노년에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가치의 변화와 더불어, 코로나19 재난 시기를 거치면서 돌봄과 양육에 대한 사회화에 대한 요구들이 전례 없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흐름들은 더이상 이전의 가족질서로 돌아갈 수 없는, 그것에 기반을 둔 삶의 재생산은 불가능함을 인지하는 시민들의 출현과 만난다.
기존 가족제도를 떠난 새로운 주체들 등장
비혼∙1인가구의 증가, 자식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은 노년인구 ∙∙∙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게 하는 사회에서, 삶의 미래라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사회에 이로운 시민과 아닌 시민을 구분하면서, 사회에 ‘이롭지’ 않다고 간주되는 시민들은 가족을 만들 수도, 만들어서도 안되는 존재로 간주해왔다. 즉,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시민의 삶과 연결시켜왔고,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 수 없는 퀴어나 장애가 있는 시민들, 가난한 시민들은 이상적인 시민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차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인 양 정당화 해왔다.
이러한 사회에서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시민들은 ‘가족만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태도를 취했다. 장시간의 노동을 견디면서 일하고, 가족중심의 돌봄노동을 통해서 가족끼리의 생존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간주했다. 이토록 가족끼리 생존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 해온,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의 결과는 현재 어떠한가?
노인빈곤율 OECD 국가 중 1위, OECD 평균 자살율보다 2배 이상 자살율 높은 나라, 저출생 세계 1위이다. 또한 국제협력개발기구 OECD 에서 38 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더 나은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조사 중 ‘내가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척이나 친구, 이웃이 있는지’ 묻는 공동체 연대성(Quality of Support network)에 관한 질문에서 한국은 2019~2021년 평균 38개국 중 38위였다.(참고 “[삶의 질 보고서] 한국인 만족도, OECD 꼴찌서 세번째…콜롬비아 수준”, 아주경제 2023. 2. 20)
이렇듯, 개인이 경험하는 불평등이나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게 하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없음’의 상태는 퀴어, 장애인, 여성, 가난한 사람들, 이주자 등 소수자만이 느끼고 있는 게 아니다. 미래는 특정한 계급이나 자원이 있는 시민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많은 시민들 또한 체감하고 있다.
누구랑 의지하고, 서로를 돌볼 것인가
사회적인 모델 부재,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
이 실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사회적인 징후로 보고 접근할 것인가? 지금의 결과는 사회적인 유대와 연대의 부재이며, 기존 가족을 넘어서 상호의존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이 취약한 사회임을 의미한다. 가족끼리 알아서 생존하고, 생존을 맡길 수 있는 가족이 없으면 사회적인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상실한 것은 사회적인 유대이며, 연대의 가치들이다.
사회적 재생산은 돌봄, 휴식, 관계에서의 소속감, 세대 재생산, 행복의 의미, 소속감 등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러한 필수적인 가치들을 가족에게 일차적으로 일임해왔다.
▲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 마저 누군가에게는 투쟁의 영역이 된다.”(김순남) 작년 8월 12일, 2022 홈리스추모제 추모팀(나눔과나눔, 동자동사랑방, 조계종사회노동위원회, 화우공익재단,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이 공동주최한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 가족대신 장례] 시민사회단체 워크숍에 참여한 필자의 모습. 공영장례제도의 현재와 한계, 앞으로의 과제를 짚는 자리였다. (가족구성권연구소 제공 사진)
시민들이 내가 누구랑 의지하고, 서로를 돌보고, 어디에서 머물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적인 모델이 부재한 사회를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일상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김현미,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 문화』 제13권 2호)
이렇듯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전면화되고 있고, 한편으로 기존 가족을 떠나서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가족구성권 운동의 새로운 시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회적 재생산 모델을 찾아가기 위해서 정치적이고 변혁적인 의제들을 교차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기라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회적 재생산 모델은 기존 가족중심의 가족질서 ‘안’에서 생존과 소속감과 돌봄을 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의 확장을 통해서 기존 가족 너머에서 돌봄과 상호의존을 확장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가족 상황과 무관하게 개인이 사회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삶이 재생산 될 수 없는 조건들을 ‘불평등’의 문제로 가시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사회적인 자원들-계급, 나이, 섹슈얼리티, 성별정체성, 여성, 장애, 이주. 싱글맘 등-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은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성소수자 집단만 보아도 그렇다.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내가 누구랑 접속하고,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지에 따라서,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이나 생존전략 등이 단일하지 않다. 한쪽에서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해 이주를 하거나, 해외에서 동성결혼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을 하면서 ‘인정투쟁’에 개입하는 흐름들이 가시화되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일찍 집을 떠나서 탈가정한 ‘시민’으로 살아가느라 생존이 어려운 청소년 혹은 퀴어들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취약한 세계 속에서 서로 유대를 맺고 생존하면서, 커플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공동체를 만들고 돌봄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퀴어들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배우자 혹은 동반자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 개입하여 바꾸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원 가족 안에 돌봄과 생존을 맡기는 가족제도 자체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며, 가족을 떠나서도 살아갈 수 있는 분배의 정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시사점을 제기한다.
배우자, 커플 중심 관계에서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 관계망으로
양육∙돌봄을 중요한 공적 영역으로 바꿔내야
자본축적이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는 시민만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거나, 이들에게만 시민으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가족상황과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동반자를 선택하고, 의지할 수 있고, 충분한 돌봄과 상호의존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가족을 정치화하는 실천이며, 사회적인 연대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에서 ‘우선 순위를 바꾸는 정치’가 기존 자본주의의 사회질서를 바꾸어내는 정치적인 의제임을 언급하면서, 양육과 돌봄 등을 중요한 공적인 영역으로 바꾸어내는 것을 변혁의 과정으로 언급한다. 누군가를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가족 안의 이슈도 아니고,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책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참조)
이는 도구적인 인구정책을 넘어서, 기존 가족 단위로 삶의 재생산을 일임해온 사회에 개입하는 ‘사회적 재생산 정의’를 실천하는 장과 연결된다. 사회적 재생산 정의는 삶이 이어지는데 필수적인 소속감, 유대, 상호협조 등과 관련해 ‘가족중심, 혈연중심으로 삶이 재생산된다’고 간주하는 사회에 개입하는 것이다. 시민 누구나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의 순위가 민법 779조(가족의 범위)에 따라서-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등-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사회적인 의제로 정치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적 재생산 정의를 실천하는 장은 ‘퀴어가족정치’의 장과 만난다.
▲ 김순남 저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앞뒤 표지 이미지. (오월의봄, 2022)
기존 가족제도를 떠나서도 삶이 재생산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상상하라
퀴어가족정치의 장, 새로운 상호의존의 가능성 모색
이러한 지점에서, 사회적 재생산 정의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맺고 있는 소중한 관계의 순위가 민법 779조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폐쇄적인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불평등한 가족제도를 재구성하면서, 여러 갈래의 상호의존의 관계망을 사회적인 의제로 정치화하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과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존 가족 ‘안’에서의 돌봄, 유대, 의존적인 삶을 당연시하지 않고, 기존 가족제도를 떠나서도 삶이 재생산될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를 확보하고자 하는 가족구성권 운동을 ‘퀴어가족정치의 장’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퀴어가족정치는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이나 불평등만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질서에서 불평등으로 연결된 많은 시민의 삶을, 그리고 그러한 삶들의 연결고리를 의제화하는 것이며, 중요하고 소중한 관계로서 제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관계성들을 의미화하면서 새로운 상호의존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이다.”(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14쪽. 오월의 봄, 2022)
이러한 지점에서, 퀴어가족정치는 혼인평등 운동이나 생활동반자법을 통해 법적인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가족정치의 핵심적인 의제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족정치가 성별이분법을 해체하는지, 시민적인 유대와 돌봄의 관계망을 확대하는지, 다양한 차별에 기반한 위계적인 관계의 문법을 해체하는지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사회권을 교차적으로 연결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천이다. 퀴어가족정치는 법적으로 가족으로 인정되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가족을 불평등의 의제로 삼으며, 노동, 빈곤, 성차별 등 여러 의제들을 교차적으로 정치화하면서 새로운 삶의 정치학을 모색하는 실천이다.
사회적 재생산 위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 운동이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연대를 확장할지, 그리고 어떤 차별이 중요한 의제로 놓여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쉽지 않는 국면에 놓여 있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는 혼인평등 운동이나 생활동반자관계를 위한 가족구성권 운동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공적으로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서 경험하는 차별이나 고통해소뿐만 아니라 기존 가족을 넘어서 사회적인 유대와 연대의 확장을 모색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필자 소개] 김순남. 가족 상황 차별을 해소하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모색하는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여성학 박사를 마치고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젠더 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음. 주요 저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 『다시 쓰는 여성학』(공저), 『시설사회』(공저),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등.
※가족구성권연구소는 2006년 7월 13일, 당시 민주노동당의 제안으로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으로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장애여성공감, 언니네트워크, 여러 퀴어/페미니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함께했고, 이후 사회복지연구소 물결도 합류했다. 2019년 1월 24일 연구소로 전환하였으며,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 일다(2023.07.05.일자) 🔗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