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가톨릭평론] 가족구성권, 새로운 유대와 결속 ③ 영화적 재현과 탈락 사이에서 가족 너머를 상상하기

가족구성권연구소
2026-01-01

가톨릭평론 제49호(우리신학연구소, 2025년 9월)에 실린 김경서 위원의 기고를 옮깁니다.

사진, 표 등을 포함한 원문과 가톨릭평론 정보는 본문 하단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가족 너머를 상상하기: 영화로 들여다보는 가족의 기능


김경서 | 가족구성권연구소 기획운영위원



"이놈의 집구석"


'집구석'은 '집안'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집안'은 문자 그대로 집의 안쪽이라는 의미인데, 가족 공동체를 일컫는 동시에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이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놈의 집구석’이라는 친숙한 어구를 통해 가족 공동체뿐만 아니라 물리적 실체인 집 또한 사람들의 고민거리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몸이 존재하는 한, 가족과 집은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집’이라는 물리적 요소와 떼어낼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가족’이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로 쓰이는 이유다. 더군다나 그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흥미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전복적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다.


이 전복성의 배경에는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남자 주인공의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가족을 활용해온 한국 상업영화의 역사가 존재한다.1 질적 혹은 장르적 차이를 넘어, ‘집밖-일터-남성’이라는 공적 장소와 ‘집안-가족-여성’이라는 사적 장소의 이분법적 재현은 한국영화가 대중의 공감을 사기 위해 보편적으로 의지하는 공식이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안방극장에서만 볼 수 있도록 연속극에 가두어지곤 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재현은 2000년대 초부터 서서히 힘을 잃었지만, 그 기저에 놓인 젠더와 가족에 대한 주류적 관점은 여전히 공고하기에 ‘집안’을 재현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 여성과 소수자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가족을 다루는 콘텐츠가 많아졌다. 그중에서도 주목해 살펴보고 싶은 작품은 2022년에는 방영된 드라마 〈작은 아씨들〉, 2023년 개봉한 영화 〈딸에 대하여〉, 2024년에 개봉한 영화 〈럭키, 아파트〉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선량한 마음을 지닌 이 세 개의 작품은 모두 여성 캐릭터와 집이

라는 공간, 그리고 가족이라는 장소를 각기 다르면서도 어딘가 비슷한 방법으로 경유한다. 각 작품이 수용하고 거부하는 영역을 비교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한계를 짚고자 한다.



<작은 아씨들>: 가족으로 환원되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동명 소설2을 현대 한국에 맞추어 각색한 이 작품은 다정하고 올곧은 부모가 등장하는 원작과는 달리 산더미 같은 빚을 떠넘긴 채 국경을 넘나들며 사고치는 부모가 그려진다. 1화에서부터 엄마는 막내의 수학여행 자금을 들고 남편이 있는 필리핀으로 도망친다. 가족이 복이 아닌 벌이 되는 순간이다. 빈곤 앞에서 주인공 세 

자매는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 첫째 오인주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돈을 쫓아다니고, 둘째 오인경은 가난에 지지 않겠다는 듯 정의를 추구한다. 막내 오인혜는 그 모든 발버둥이 지겹다. 이야기는 첫째 오인주가 700억 원을 우연히 얻게 되면서 시작된다. 세상에 그저 노는 돈 700억 원은 없다. 이것은 ‘정란회’라는 비밀조직과 재벌가의 비자금으로 축적된 돈이다. 이후의 서사는 복잡하게 제시되지만 흐름은 간단하다. 자매들은 힘을 합쳐 정란회에 맞서 싸우고 서로를 구출한다. 그리고 그런 자매에게 집과 돈이 주어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선하고 정의롭다. 단순한 권선징악의 플롯을 거부하며 주인공의 선택과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태도를 작품 내내 견지하고 때때로 그것은 탁월한 형태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고질적인 문제인 비자금 이슈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그 돈에 얽힌 정란회의 모습을 통해 재벌가

와 정치세력의 담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작품은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집’과 ‘가족’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먼저 집을 살펴보자. 대부분 중요한 사건이 누군가의 집에서 벌어진다. 세 자매의 집, 고모할머니의 집, 그리고 재벌가의 집. 특히 재벌가의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동떨어진 하나의 세계 혹은 일종의 요새처럼 묘사한다. 그에 반해 세 자매의 집은 문자 그대로 집구석이다. 그곳에는 포기할 수 없는 가족이 있다. 이야기의 맹점은 이곳, 바로 가족이다.


〈작은 아씨들〉의 서사는 꾸준히 돈을 따라간다. 정란회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자본이 어떻게 정치와 결탁하는지를 제시하고 그 돈과 이해관계가 정확히 ‘가족’이라는 경제 공동체를 통해 유통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들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 단호함이 세 자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가족’인 고모할머니가 물려주는 한강뷰 아파트는 무해한 보상처럼 그려진다. 무엇보다 마지막 화에서 오인주가 받은 300억 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막내 오인혜의 친구 박효린이 앞서 처벌한 재벌가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했던 족쇄였던 가족을 통해, 오로지 그것만을 통해 자본을 형성한다. 가족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결국 가족으로 환원되어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는 모습은 작품 내내 견지되어온 사회비판적 태도를 무화시킨다.



<딸에 대하여>: 선량하게 검열된 가족


2023년 개봉한 이미랑 감독의 영화 〈딸에 대하여〉는 〈작은 아씨들〉에서 어쩌면 한 발 더 나아갔는지도 모른다.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3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엄마, 딸인 그린, 딸의 여자친구인 레인. 비록 엄마의 시선을 거치긴 하지만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일정 정도 

이상의 미덕과 진보성을 담보했음을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늙은 엄마와 젊은 레즈비언 딸 그리고 딸의 애인이 함께 살 때 벌어질 만한 갈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만 ‘엄마’에게 돌봄 노동자로서 역할을 부과해 극이 전개될 만한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간강사인 그린이 돈이 없어 여자친구인 레인과 함께 엄마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한다.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엄마는 레인을 시종일관 예의바르게 거부한다. 영화는 엄마의 혐오가 노년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음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킨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 자신이 갑자기 데려온 어르신에게도 잘하는 레인을 보면서 엄마의 마음은 점점 누그러진다.


영화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세련된 연출과 촬영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모든 요소 또한 정의롭다. 돌봄노동에서 긴밀하게 오가는 미세한 상호작용은 보는 사람이 돌봄의 의미를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게 한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는 퀴어 커뮤니티도 익숙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영화는 이런 모습을 입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연출한다. 요양원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재단이 어르신을 모시지 못하는 상황4도, 시설에서 노인에게 약을 먹이는 이유도 현실에서 마주한 것처럼 명확하게 이해된다. 한편 등장인물들은 훌륭하게 교육받은 동료 시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의 엄마는 정의로우면서도 섬세하고 강하면서도 고결하다. 비록 아직 딸의 애인을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권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지 알고 있다. 심지어 세입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군말없이 고쳐주고 때로는 그들의 아이들도 돌보는 모범적인 집주인이다. 딸인 그린도 동료를 위해 직업을 걸고 투쟁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딸의 애인 레인은 그런 그린의 옆을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파트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름다운 동시에 검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열된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재현한다. 입체적 연출에도 불구하고 모든 요소가 지나치게 적당한 이유는 그 가족이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적당함으로 인해 갈등하고 화합하고 정의로운 순간이 핍진성을 잃고 만다. 다정하면서도 어딘가 무덤덤한 그린의 모습은 중산층 가정을 재현할 때 주로 등장하는 ‘아들’과 닮아 있다.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현명하고 꾸준한 레인의 모습은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며느리’와 닮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함을 증명하는 ‘어르신.’5 그렇게 이들은 정상가족보다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완성한다. 이들의 모습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바깥의 시설과 대비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르신’은 이 가족 안에서라야 온전하게 돌봄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미운 털 하나 없는 가족의 모습으로 인해 관객은 의심을 갖게 된다. 그 의심은 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말아야 했던 것, 예를 들면 엄마의 혐오에 지쳐가는 레인의 모습, 장기화되는 돌봄에 대한 비용 등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룰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어르신이 가족에게 무리가 되지 않도록 완벽한 타이밍에 돌아가시는 순간 확신이 된다.



<럭키, 아파트>: 축소되는 욕망


2024년 개봉한 〈럭키, 아파트〉는 〈딸에 대하여〉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동성커플의 주거 문제를 이야기한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결혼제도를 거치지 않고서는 집을 마련할 정도의 자산을 형성하기가 힘들다. 집값이 더는 임금노동으로 커버할 수 없을 만큼 상향평준화되어 있고, 결혼을 하면 신혼부부에게 자산형성을 도모하기 유리한 수많은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는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이른바 ‘영혼 끌어모으기’로 아파트를 구입해 살고 있다. 선우는 실직자이고 희서는 보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영끌’까지 해서 구입한 아파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선우는 냄새를 추적하다가 아래층에서 할머니가 고독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할머니 신임의 예전 여자친구까지 만난다. 선우와 희서는 비슷한 처지의 신임과 성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우와 희서는 신임의 유품을 땅에 묻어주며 애도한다.


영화는 담백하고 부지런하다.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할 수 있는 한 손을 길게 뻗어 닿는 곳까지 최대한 품으려 한다. 좀처럼 이웃 간의 교류가 없는 아파트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냄새’를 이용해 주인공과 타자를 연결한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규범

적인 커플이다. 그들은 ‘영끌’로라도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을 갖췄으며, 갈등할지언정 서로에게 충실하다. 규범적인 이들이 수직적인 아파트 공간을 뚫고 무연고자인 신임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냄새, 즉 악취로 은유되는 소수자성이다. 자신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보다 관객을 무섭게 조여오던 그들 사이의 다툼은 뒷산에서 신임을 애도하며 해소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영화는 성소수자의 권익과 관련해 서사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나아가 부동산에 관련된 이해관계가 어떻게 사람들의 혐오와 공명하는지 설명한다.


영화가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도 끝내 돌파하지 못하는 지점은 바로 욕망이다. 〈럭키, 아파트〉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집을 향한 욕망이다. 같은 내용도 권리로 주장하기는 쉽지만 욕망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영혼을 끌어 모아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인물의 일

상, 특히 희서의 일상에서는 유독 정상성을 향한 욕망이 돋보인다. 영화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관객이 미처 생각해보기도 전에 빠르게 권리의 문제로 희석시킨다. 권리와 욕망은 대치되지 않지만 양립하여 담아내기에 힘들 수 있기 때문에, 숙제가 많은 이 영화에서는 대부분 사건을 권리의 문제로 다루며 지나간다. 안타깝게도 그런 순간이 반복됨에 따라 본래의 설정에 내포되었던 가능성이 점차 소실된다. 그로 인해 후반부에 이르러 신임의 죽음에 대해 인물이 반응할 수 있는 감정의 폭과 층위가 다소 제한된다.



가족 너머를 상상하기


지금까지 〈작은 아씨들〉,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를 ‘가족’이 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2022년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발표된 3개의 작품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가족에 대한 기존의 이분법적 재현을 지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가족에 대한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 한편 이들은 똑같이 가족을 다루면서

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 〈작은 아씨들〉은 가족으로 환원시키는 모습에 집중하고, 〈딸에 대하여〉는 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럭키, 아파트〉는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그려낸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가족 형태를 향한 어느 정도 이상의 운동성을 담보하면서도 공통적으로 같은 지점, 구체적으로는 가족이 자본

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경제 공동체라는 지점을 우회한다.


그러나 가족의 경제적 기능을 마주하지 않고 과연 가족 너머를 상상할 수 있을까. 가족을 구성하는 일이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형태가 자연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비롯해 돌봄, 부양, 양육 등 대부분의 생존 자원이 가족을 경유하여 분배되기 때문이다.6 국가는 출산부터 시작하여 한 인간이 자라나는 데에 필요한 

모든 노동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사적 영역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국민국가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안정적인 재생산7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인구를 재생산할 수 없거나 노동에 복무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이들은 ‘가족’에서 소외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량함이 아니라 가족의 실체를 마주볼 용기일지도 모른다.






1 강성률, 『한국 영화에 재현된 가족 그리고 사회: 〈미몽〉에서 〈고령화 가족〉까지』(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8).


2 루이자 메이 올콧, 『작은 아씨들』(알에이치코리아, 2020).


3 김혜진, 『딸에 대하여』(민음사, 2017).


4 극중에서 주로 ‘어르신’으로 불리는 이제희(허진)은 젊은 시절, 자신의 이름을 따서 복지 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운영이 어려워지자 재단 측에서는 요양원에 후원을 중단한다.


5 극중에서 엄마(오민애)는 자신이 돌보던 ‘어르신’이 열악한 환경의 요양원으로 이송되자 직접 찾아가 어르신을 본인의 집으로 데려온다.


6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서해문집, 2023), 15쪽.


7 가족구성권연구소, 『가족신분사회』(와온, 2025),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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